전 세계가 에너지 가격과 물가 폭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덩달아 서민들의 발인 대중교통 요금까지 오르는 가운데 독일이 지난해 9유로짜리 정기권 티켓을 내놔 눈길을 끌었다.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도 이 티켓 하나로 기차·지하철·버스를 무제한 탈 수 있다.
독일 역시 50년 만에 물가 최고치를 기록 중이다. 그런데도 에너지 이용료 인상과는 반대되는 정책을 실시했다. 한화로 1만2천 원에 해당하는 정기권 티켓은 한시적으로 시행됐지만, 무려 2조5000억 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됐다. 에너지 이용료를 줄여주려고? 서민 복지 차원에서? 놀라운 건 정책의 최우선 목적이 기후변화 대응이었다는 점이다.
전문가 그룹은 해당 정책이 이뤄진 3개월간 이산화탄소 180만t이 덜 배출된 것으로 추산했다. 대중교통 미이용자 중 20%가 정기권 티켓을 이용했고, 한 달에 1~2번 정도만 이용했던 시민도 27%나 참여했다. 자가용 이용자 중 절반가량이 대중교통을 이용한 것으로 실로 놀라운 결과다. 이로 인해 시민단체들이 한시적으로 끝내지 말고 계속 시행해달라라고 시위까지 하고 있단다.
이에 따라 연방정부는 5월부터 대중교통 무제한 티켓을 상시화하고, 베를린은 29유로 티켓을 운영하는 등 다양한 정책들이 나오고 있다. 사실 독일의 대중교통 이용 활성화 정책은 이미 10여 개를 훌쩍 넘길 만큼 많다. 그 중심에는 기후변화대응이 있다. 우리나라가 최근 난방 등 에너지 이용료와 대중교통 요금 인상을 논의하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고민 없이 경제적 지표만을 고려한 것과는 비교된다.
시민 다수의 참여를 이끄는 독일의 남다른 정책은 타 분야에서도 두드러진다. 도시계획 설계·심의과정에 기후변화와 환경적 요소가 의무화돼 있고, 신재생에너지 사용 의무 비율과 탄소발자국 산정 조건도 꽤 까다롭다. 하루 1인당 물 사용량(제품의 원료-제조-유통-사용-폐기까지의 물발자국)은 150ℓ 정도로 주로 캠페인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280ℓ 정도의 절반 수준이다.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건 독일은 정부나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적 기조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기후변화대응 강도는 더 세진다. 전 총리 때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65%로 강화하면서 2038년까지 석탄 화력을 폐지한다고 했는데 현 총리는 2030년까지로 앞당긴단다.
기업들도 기후변화대응과 ESG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께한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화석연료 사용 내연기관차를 2035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며 유럽 27개국 제조사들을 이끌었다. 그간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해온 철강회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준비단계인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수소 환원 제철 방식이나 재활용 철강을 이미 적용 중이다. 이렇듯 독일기업들은 제품의 원료생산부터 폐기까지 전 생애주기(LCA라 부름)에 걸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산정해 기업공시하고 협력사까지로 확대해 이행한다. 올해부터는 이런 과정을 규제하는 공급망 실사법까지 시행하고 있다.
2050년 넷제로(Net Zero)를 2045년에 조기 달성하겠다고 선언한 독일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바로 정책이다. 이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의 연대와 협력, 상호 유기적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정부와 민간기업, 시민단체 간 끈끈한 연결성도 더해진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기후변화대응 2020년 목표도 높지도 않은 수치를 처음부터 실패했다. 우수 사례만 따라 해도 될 텐데 모두 단절된 느낌이라 이마저도 쉽지 않다. 2023 기후변화대응지수(CCPI)에서 57위로 꼴찌 수준인 우리는 절박한 마음으로 이 성적표를 기억해야 한다. '제조업 강국'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는 독일과 한국이지만 탄소중립에서는 간극이 너무나 크다. 지금 당장 서둘러도 늦다.
/이재현 인천대 도시환경공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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