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 임인년의 가을은 깊어가고, 깊어가는 계절 따라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서늘히 쌓여 간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 인간은 순식간에 늙는다.
최영미 시인은 한국의 여류시인 중, 가식에 휘둘리지 않는 솔직한 담론으로 문단 활동을 이어가는 몇 안 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지난 날 미투 운동의 선봉에서 '괴물'이란 시 발표를 통해 지명도 있는 문단 중진을 퇴진시킨 일은 꽤나 유명한 일이다. 그 사건으로 법정 다툼까지 불사한 신념 가득한 시인, 그 시 '괴물'의 마지막 구절은 퍽 인상적이다. '이런 더러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이토록 단단한 시인에게 이런 연약한 감성이 숨겨져 있었다니 놀랍다.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니? 참 솔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 고백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솔직함일지 모른다. 감추고 숨기는 것이 미덕인 시절도 분명 있었지만, 이젠 다 변했다. 세계도 문화도 사람도 변했다. 사랑의 방식도 변해 그 마음을 더 이상 감출 필요도 없어져 버렸다. 나는 최영미 시인의 솔직함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대리만족 같은 청량감을 느낀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이 가을에는,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한번 누워 보고 싶은 열망에 들떠 본다. 옆에 누운 사람이 누군들 뭐 대수랴. 따뜻한 물 한잔에 청명한 가을바람 한 점만 타 마셔도 좋을 것을. 오늘 사랑하지 않으면 내일이 없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원로시인의 시구처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최영미는 누가 뭐라 해도 이 시대의 시인이다.
/권영준 (시인· 인천삼산고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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