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남진우

헌책방 으슥한 서가 한구석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내 들춰본다

먼지에 절고 세월에 닳은 책장을 넘기다

낯익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

아, 전생에 내가 썼던 글들 아닌가

전생에서 전생의 전생으로 글은 굽이쳐 흐르고

나는 현생의 한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잡고 있다

한 세월 한 세상 삭아가는 책에 얼굴을 박고

알 수 없는 나라의 산과 들을 헤매다 고개를 드니

낡은 선풍기 아래 졸고 있던 주인이 부스스 눈을 뜨고

이제 문 닫을 시간이라 말한다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

 

으슥한 서가 한구석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책을 꽂고

조용히 돌아서 나온다

▲ 누군가 낮잠을 자는 사이 또 한 계절이 지나가고, 인생도 지나가고, 표절도 낙엽처럼 쌓여간다. 세상에 온전한 내 것이 몇이나 되겠는가. 따져보면 나를 둘러싼 세계는 거의 대부분 누군가가 이미 발표한 기발표작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기발표작들도 또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 또한 과거 어느 누군가의 기발표작일테지만, 우리 인생사의 모든 일들을 돌이켜보건대 생사조차 베끼고 있으니 베끼지 않은 것이 그 무엇이랴.

그러나 나는 지금도 쓴다. 누군가가 오래전 이미 쓴 적이 있는 퇴색된 글들을 쓰고 또 쓴다. 누군가 낮잠을 자는 사이에도 나는 전생을 몇 번이나 다녀왔고, 일장춘몽의 헛된 꿈을 베끼고 또 베겼다. 시의 화자가 읽고 있는 오래된 책의 저자 역시 허망한 표절의 길을 걷다 떠난 고인일테지만, 그가 남긴 노고의 족적만은 우리가 폄훼해선 안 된다. 고인을 따라 걷는 길은 바로 우리 삶의 진실한 역사일 터,

나는 묻고 싶다. 나는 지금 이승과 저승 사이 어느쯤의 전생에 머물러 있는가. 내가 지금 읽어나가는 이 삶의 문장은 어느 전생에서 누군가가 이미 썼던 퇴색한 문장일 뿐 새로운 것이 아님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누군가 베껴온 글을 왜 옮겨써야 하는지, 베끼고도 베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승의 수많은 문사들은 양심고백에 앞서 저 헌책방에 먼저 다녀와야 할 것이다.

아 내 삶 자체가 전생의 누군가의 삶이었으니,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

▲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br>
▲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



관련기사
[시, 아침을 읽다] 가을에는-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그럴 때면 그 [시, 아침을 읽다] 노을 무덤-이성선 아내여 내가 죽거든흙으로 덮지는 말아 달라언덕 위 풀잎에 뉘여붉게 타는 저녁놀이나 내려이불처럼 나를 덮어다오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사람 있으면보게 하라여기 쓸모없는 일에 매달린시대와는 상관없는 사람흙으로 묻을 가치가 없어피 묻은 놀이나 한 장 내려덮어 두었노라고살아서 좋아하던 풀잎과 함께 누워죽어서도 별이나 바라보라고 ▶ 참 가슴 뭉클한 시다. 쓸모없는 일에 매달려온 자신의 주검을 흙으로 덮지 말고, 피 묻은 저녁놀이나 한 장 덮어달라니, 시인의 결곡한 자괴가 시에 묻어 있다. 시인이 가정적으로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시인은 살아생전 [시, 아침을 읽다] 그리운 이름-배홍배 흔들리는 야간 버스 안에서울리지 않는 핸드폰을만지작거리다저장된 이름 하나를 지운다내 사소한 사랑은그렇게 끝났다.더듬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나를일격에 넘어뜨리는 가로등,일어나지마라쓰러진 몸뚱이에서어둠이 흘러나와너의 아픔마저 익사할 때그리하여도시의 휘황한 불빛 안이너의 무덤속일 때싸늘한 묘비로 일어서라그러나 잊지 마라묘비명으로 새길 그리운 이름은그립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이다 그리움을 잃은 삶은 이미 생명력을 다한 식물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추동력은 과거에서 나오고, 과거는 이미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 [시, 아침을 읽다] 한 발, 첫 발자국-박남준 한 발, 첫 발자국-박남준새의 노래를 듣기 위해 새장을 사지 않고주머니를 꺼내 모이 그릇에 채워놓지 않고한 그루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며향기로운 그늘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꽃을 꺾어 창가에 놓지 않고꽃씨를 뿌리며 그 꽃씨가 퍼져나가세상을 물들이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제 몸의 온기를 나누어쫓기고 지친 마음을 껴안을 수 있다면한 뼘은 더 따뜻해질 것이다우주의 시간이 빛날 것이다새해 첫 마음 한 발, 첫 발자국,내 안의 바로 너나 또한 세간의 문을 열고 그 길에 한 걸음내딛는 시작이기를▲ 새해 첫날, '한 발, 첫 발자국'을 [시, 아침을 읽다] 사랑의 감옥-오규원 사랑의 감옥-오규원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견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