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감옥-오규원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 엄마는 뱃속 아가를 위한 털옷을 겹겹이 입었다. 아이를 감춰둔 곳은 사랑의 감옥, 그 속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한시적인 보호막에 둘러싸인 모성이라는 감옥이다. 이제 곧 아이를 감싸고 있던 털옷이 차례로 벗겨지고 아이는 세상이라는 세찬 폭풍우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곳은 부드러운 바람과 햇볕이 있는 세계이나, 아이가 울며 견뎌야 하는 또 다른 사랑의 감옥이다. 아이가 자라면 제 아이를 위한 털옷을 배운 대로 또 두르게 될 것이고, 그 아이도 엄마의 품을 벗어나 세상이라는 감옥을 또 견디게 될 것이다. 엄마는 강하지만, 그러나 털옷 하나로 아이를 감싸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 또한 엄마이니, 그러니 어찌 그 털옷 하나로 세상의 추운 바람을 다 막아줄 수 있을 것이냐.

사랑이라고 하여 모두가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닌가 보다. 이 시에 드러난 '사랑'과 '감옥'의 등가적 가치는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름다운 삶 이면에 감춰진 처절한 생존 실체를 보여준다. 어쩌면 인생이란, 구멍 숭숭 뚫린 푸른 들판의 컨테이너 속에 갇혀있는, 그 서늘한 견딤이라고 이 시는 말하고 있다.

▲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br>
▲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



관련기사
[시, 아침을 읽다] 한 발, 첫 발자국-박남준 한 발, 첫 발자국-박남준새의 노래를 듣기 위해 새장을 사지 않고주머니를 꺼내 모이 그릇에 채워놓지 않고한 그루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며향기로운 그늘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꽃을 꺾어 창가에 놓지 않고꽃씨를 뿌리며 그 꽃씨가 퍼져나가세상을 물들이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제 몸의 온기를 나누어쫓기고 지친 마음을 껴안을 수 있다면한 뼘은 더 따뜻해질 것이다우주의 시간이 빛날 것이다새해 첫 마음 한 발, 첫 발자국,내 안의 바로 너나 또한 세간의 문을 열고 그 길에 한 걸음내딛는 시작이기를▲ 새해 첫날, '한 발, 첫 발자국'을 [시, 아침을 읽다] 낮잠-남진우 낮잠-남진우헌책방 으슥한 서가 한구석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내 들춰본다먼지에 절고 세월에 닳은 책장을 넘기다낯익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아, 전생에 내가 썼던 글들 아닌가전생에서 전생의 전생으로 글은 굽이쳐 흐르고나는 현생의 한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잡고 있다한 세월 한 세상 삭아가는 책에 얼굴을 박고알 수 없는 나라의 산과 들을 헤매다 고개를 드니낡은 선풍기 아래 졸고 있던 주인이 부스스 눈을 뜨고이제 문 닫을 시간이라 말한다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 으슥한 서가 한구석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책을 꽂고조용히 돌아서 나온다▲ 누군가 [시, 아침을 읽다] 가을에는-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그럴 때면 그 [시, 아침을 읽다] 노을 무덤-이성선 아내여 내가 죽거든흙으로 덮지는 말아 달라언덕 위 풀잎에 뉘여붉게 타는 저녁놀이나 내려이불처럼 나를 덮어다오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사람 있으면보게 하라여기 쓸모없는 일에 매달린시대와는 상관없는 사람흙으로 묻을 가치가 없어피 묻은 놀이나 한 장 내려덮어 두었노라고살아서 좋아하던 풀잎과 함께 누워죽어서도 별이나 바라보라고 ▶ 참 가슴 뭉클한 시다. 쓸모없는 일에 매달려온 자신의 주검을 흙으로 덮지 말고, 피 묻은 저녁놀이나 한 장 덮어달라니, 시인의 결곡한 자괴가 시에 묻어 있다. 시인이 가정적으로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시인은 살아생전 [시, 아침을 읽다] 토마토-이민하 토마토-이민하둥글고 붉은 토마토가 있다 四角의 방 안에 있다 한 사람이 옆에 있다 아버지의 안경을 쓴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가만히 보니 애인의 얼굴이다 그의 핏발 선 두 눈이 군침을 삼키던 나를 불결한 듯 욕실로 떠다민다 입이 파랗게 허기진 나는 높다란 선반에서 꺼낸 구름으로 입 안 가득 이빨을 문질러 닦고는 들어온다 방으로 오는 데 한나절이 걸린다 사람이 사라졌다 둥글고 붉은 토마토가 사라졌다 새하얀 사각의 캔버스만 놓여 있다 캔버스를 들여다보니 둥글고 붉은 토마토가 거기 있다 나는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린다 둥글고 [시, 아침을 읽다] 우중월정(雨中月精)-이연수 우중월정(雨中月精)-이연수오대산 월정사 객방에 머물면물이 흐르고 비가 온다 깨달음을 얻으러오른 산행길근심이 떠나지 않은 날먹구름이나를 돌고너를 돌고 계곡물 소리가 공중에서 내려온다근심이 멀어지고 나를 돌아보는 곳비를 깨달아 가고월정사 앞 오대천 물은나를 돌고너를 돌아 오대산 월정사 객방에 머물면물이 흐르고 비가 온다 산봉우리 사잇길마다안개가 연꽃처럼 피어오르고비를 깨닫는 오대산에흰구름이나를 돌고너를 돌고 비는 나에게비는 너에게몸으로 스며들고▲ 오대산 월정사에는 두고 온 오래된 기억들이 산다. 전나무 숲길을 따라 흐르던 숲 향에 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