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농사가 호미로 논 갈던 때라 엄청 고생했지
70년대 제초제·이앙기 나오니까 노는 거 같더라고

그래도 농사는 정성만큼 돌아와…부지런히 60년 짓다보니,
모내기 없이 마른 땅에 파종하는 법도 터득했어

농부 맴은 농부가 안다고,
농사비법 나누고 궂은 일 도왔더니 공적비 세워주더라구"

쌀은 생명을 잇는 끼니였고 우리 문화는 쌀을 중심으로 피어났다. 서구화된 식단에 밀려 점차 우리 밥상에서 멀어지고 있는 '쌀'. 동시에 사라져 간 '쌀의 추억'. <천년밥상, 경기米이야기 농쌀직썰 2부>에서는 경기미의 옛이야기를 쫓아 쌀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경기인들의 쌀 문화, 쌀에 대한 '썰(設)'을 풀어본다.

▲ 농부의 얼굴이 고개를 숙여가는 벼 처럼 검게 익어간다. 간만에 비구름이 물러난 맑게 개인 하늘이 농군에겐 반가울 따름이다.
▲ 농부의 얼굴이 고개를 숙여가는 벼 처럼 검게 익어간다. 간만에 비구름이 물러난 맑게 개인 하늘이 농군에겐 반가울 따름이다./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땅이 있으니 내가 있고 내가 있으니 농사를 짓는 거지요. 신토불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땅, 우리 물, 우리 고장에서 나는 곡식, 농부가 흘린 땀 만큼 맛있는 쌀이 나는 법이거든요.”

우리네 인생은 흙과 함께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 흙 위에 집을 짓고 흙에서 난 것들을 먹으며 여생을 마친 뒤엔 흙에 묻힌다. 농부의 삶은 흙에 더 가깝다. 이들에게 흙은 고향이자 젖줄이며 희망이다. 농사는 흙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논이며 밭이며 농군이 흘린 땀 만큼, 들인 정성만큼, 정직한 결과를 보여주는 게 또 흙이란다.

한평생 '흙'을 믿어 온 이가 여기 또 한 명 있다. 화성시 팔탄에서 태어나 여든을 목전에 두고도 쌀 얘기뿐 인 나종석(78)씨다. 오죽하면 그를 두고 미농(米農)이라 했을까.

“땅이 있으니 내가 있고 내가 있으니 농사를 짓는 거지요. 신토불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땅, 우리 물, 우리 고장에서 나는 곡식, 농부가 흘린 땀 만큼 맛있는 쌀이 나는 법이거든요.”

스물둘, 한창 꿈 많을 나이. 선택의 여지 없이 평생 땅을 일궈온 부친을 따라 농부의 길로 들어섰다. 농부가 되고부턴 줄 곧 벼와의 전쟁 중이다. 그의 손엔 어딜 가든 빠지지 않고 호미가 들렸다.

“그때는 호미 한 자루로 농사를 짓던 때죠. 밭농사보다도 손이 많이 가는 게 벼농사라 고생했던 기억이 생경하네요.”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몇 해 지나지 않아 제초제가 나왔다. 1970년대 초부터는 경운기가 등장하더니 이앙기부터 트랙터까지 농업에는 혁명이 일어났다. 온종일 잡초와 씨름하던 때를 떠올리면 그에게 '문명의 산물'은 '신의 선물'과 같았다.

“제초제 나오고부터는 한결 농사가 수월해졌죠. 벼농사는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없어서 손이 많이 가고 사람을 써 가면서 일일이 지어야 해요. 이후로도 경운기며 이앙기며 농사 기계들이 나오니깐 열 사람이 할 일을 한 사람이 하게 된 겁니다. 일하는 게 아니라 노는 거 같더라고요.”

나종석씨는 좋은 흙이 좋은 곡식을 맺는다고 믿는다. 특히 바다가 인접해 짠기가 서린 땅에서 농사를 지어 본 '화성 농부'라면 비옥한 토양이 귀한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쌀이라는 게 토질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예전에는 주변이 전부 갯바닥이었거든요? 점질토라 해서 여기에 벼를 심으면 벼알이 굵고 색깔이 좋은 대신 맛이 거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런데 여주나 이천에 땅을 보니 이게 사질토인 거야. 우리 땅에서 자란 벼가 맛이 좋았는데 사질토였던 거지. 고라실 논(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이라서 맛좋은 쌀이 나더라고.”

 

▲ 화성시 팔탄면 들녘이 낱알이 맺힌 벼들로 고개가 익어간다./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화성시 팔탄면 들녘이 낱알이 맺힌 벼들로 고개가 익어간다./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흉년이 들까 걱정보다 풍년이 들까 걱정하는 일이 더 많은 거 같어.”

농사만큼 정직한 일은 없다. 땀 흘려 모를 심고 열심히 일한 만큼 보답해주는 게 농사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듯, 나종석씨의 하루는 동트기 전에 시작된다. 제일 먼저 논으로 가 땅을 살폈고, 남들보다 한 발 먼저 못자리를 만들었다.

“모내기 시기보다 열흘 정도는 앞서서 못자릴 만들어 놓곤 했죠. 그래야 품앗이를 도울 수 있고 내 농사를 도와줄 품앗이 손을 빌릴 수도 있으니까. 뭐든 앞서 하려는 성미 탓이죠.”

뭐든 앞서 하려는 성미는 곧 '솔선수범'이라는 말로 돌아왔다. 궂은일엔 마다치 않고 먼저 나서는 게 버릇처럼 굳어졌다. 마흔 줄에 들어서면서는 이장직을 맡아 마을 일을 도왔다.

“이장으로 일 하려면 희생이 앞서야 하죠. 1970년대 후반 즈음 정부에선 식량 자급을 위해 신품종으로 농사지을 것을 권했습니다. 노풍이니 통일벼니 신품종을 심어야 했는데 농민들은 제대로 팔리지도 않고 하니 기피했었죠. 별수 있나 내가 지은 쌀은 볏가마니로 쌓아 놓고 마을 사람들꺼 먼저 내놓아야지.”

농사며, 마을 일이며 50년 했더니 '달인'이 다 됐다. 반세기를 거치면서 세월 풍파 다 겪었다는 나종석씨. 풍년이든 흉년이든 모두 다 농군의 귀한 밑거름이됐다.

“1977년 즈음엔 가뭄이 심하게 들었죠. 저수지 물을 따서 해야 했는데 메말랐던 거지. 쌀이 많이 안 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근데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고요. 품종이 그때 노풍이었던 거 같은데 몇 개 심었더니 주렁주렁 낱알이 달리더라고요. 요즘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고민이지. 흉년이 들까 걱정보다 풍년이 들까 걱정하는 일이 더 많은 거 같어.”

농사, 오로지 한 길만을 걸어온 외길인생, 나종석씨의 철학이 담긴 '농사 비법'은 팔탄면 전역으로 넓혀갔다. 급기야 1993년에는 제8대 팔탄농협 조합장 자리에 오르게 됐고 여섯 번의 조합장을 맡아 최다 조합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경기도 농업사에 족적을 남겼다.

“이장일 때나 조합장일 때나 어깨에 힘 한번 준 적 없어요. 지금도 법인카드를 일절 쓰지 않을 만큼, 받은 임금도 죄다 농민들 지원하는 데 쓰지. 미곡처리장도 사비 들여 맨들어 놓았을 정도니까. 내 살림, 내 것이란 생각 없이는 이렇게 못해요.”

▲ 8대 팔탄농협 조합장으로 시작해 여섯번에 조합장을 맡으며 최다 조합장 타이틀을 거머 쥔 나종석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8대 팔탄농협 조합장으로 시작해 여섯번에 조합장을 맡으며 최다 조합장 타이틀을 거머 쥔 나종석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지난 2월, 나종석씨의 공적비가 팔탄농협 앞에 세워졌다. 그가 고집스럽게 설파해 온 '남들보다 한 발 먼저' 지론이 이끈 결과였다. 특히 모내기 없이 마른 땅에 파종하는 '건답직파' 재배법을 널리 알려 일손 부족한 농가에 힘을 보탰다.

“농부 마음은 농부가 안다고 자잿값 지원하고, 저온저장고 만들고 한평생 연구해 온 게 쌀이니 노하우 알려주고. 그랬더니 공적비를 세워줬네요. 미농(米農)이라면서요.”

아호는 김훈동(전 대한적십자 경기도지사 회장)팔탄농협 사외이사가 지었다. 쌀 '미(米)'자와 농사 '농(農)'을 합친 말이다.

미농은 '쌀에 미쳐있는 농부', '쌀 밖에 모르는 사람', '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농부' 등등 그의 업적을 단번에 대변한다. 일 평생 쌀 농사만 지어온 나종석씨에게 이보다 좋은 아호가 있을까?

요즘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쌀이다. 곤두박질치는 쌀값 때문에 농군들이 흘린 땀의 가치도 떨어질까 싶어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른다.

“쌀을 많이들 안 먹으니깐 걱정이죠. 쌀을 먹어야 농부가 사는 법인데…. 쌀로 요즘 사람들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낼 방법을 고민해 봐야할 때죠. 시대가 변했고 시대에 맞춰 농업도 변화해야 하는 겁니다.”

 


 

[경기인의 밥상] 간장게장

▲ 국민 밥도둑 간장게장 하나면 밥 한 그릇도 뚝딱이다.
▲ 국민 밥도둑 간장게장 하나면 밥 한 그릇도 뚝딱이다.

원조 밥도둑, 두말할 것 없이 간장게장이다. 염장한 게를 간장에 숙성시켜 건져낸 뒤 간장을 끓여 다시 절이기를 반복, 장을 완성해 낸다. 서해안의 갯벌과 인접한 화성 팔탄면 일대는 예부터 게나 맛조개, 바지락 등의 해산물을 즐겨 먹었다. 화성 토박이 나종석씨의 식탁엔 주로 게로 만든 반찬이 올랐다.

“근처 발안이 예전엔 벌안이라고 불렸는데, 화성 중·고등학교 있는 자리가 배턱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갯벌이 있다 보니깐 거서 잡은 게로 볶아서 먹거나 장으로 맨들어 먹거나 했었죠. 꽃게도 많이 잡혔고 능쟁이(칠게)가 그렇게 씹을수록 고소하고 맛있을 수가 없어요. 그때는 또 쌀이 귀하니깐 보리랑 밀을 지었는데 맛조개 잡아다가 장국, 즉 수제비나 칼국수 같은 것도 많이 해 먹고 그랬어요.”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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