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소리에 전진 징소리에 정지…전쟁 핵심 '좌작진퇴' 조율 역할
▲ 안악3호분 대행렬도 모사도.

인간은 전쟁과 더불어 살아왔다. 전쟁은 인간의 존립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존립 기반이기도 하다. 생존의 지평인 대지를 확대하거나 수호하기 위한 전쟁은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타인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전쟁은 인간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전쟁이란 국가의 큰일이며, 삶과 죽음의 바탕이고, 존속과 멸망의 길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兵者,國之大事,死生之地,存亡之道,不可不察也).” <손자병법>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전쟁에서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취하고 질 수 있는 길을 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전쟁에서 우리의 진(陳)을 유지하고 상대방의 진을 깨뜨리면 승리할 수 있다. 이때 소규모 전투의 병력처럼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는 것이 형명이다(“鬥衆如鬥寡,形名是也”, <손자병법>). 우리의 병력이 모여서 하나가 되고, 적군의 병력은 분산되어 10이 되어, 그 10배의 병력으로 분산된 1을 공격하면 아군의 병력은 많게 되고 적국의 병력은 적게 되기에 승리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좌작진퇴(坐作進退)의 절차이다. 즉 앉고 일어서고 전진하고 후퇴하는 절차에 따라 진을 유지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전쟁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좌작진퇴는 어떤 신호에 의해서 이루어질까? 하나는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소리였다. 이것을 형명(形名)이라고 한다. 소리의 경우에 북(鼓)은 전진의 신호이고, 징(丁寧)은 정지의 신호였다.

“<군정(軍政)>이라는 병서에서 말하기를 전쟁터에서는 말로 서로 들을 수 없으니 북(鼓)과 징(金)을 사용한다. 보려고 해도 서로 볼 수 없으니 깃발(旌旗)을 사용한다. 이런 금고(金鼓)와 깃발은 한 사람의 귀와 눈이 되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이미 전일(專一)하게 되면 용감한 자는 홀로 진격하지 않고 겁쟁이는 홀로 후퇴하지 않는다. 이것이 많은 병력을 운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야간 전투에서는 대부분 금고를 사용하고 주간 전투에서는 대부분 깃발을 많이 사용하는데, 사람의 이목과 통하기 때문이다.”<손자병법>

북과 징에 의해 전진과 후퇴를 알린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의하면 “초장왕과 약오씨가 고호에서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자월초가 초장왕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자 화살이 초장왕이 탄 전차의 말을 매기 위해 전차의 앞에 길게 나와 있는 끌채를 지나 북을 매다는 틀을 꿰뚫고 징(丁寧)에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선공 4년(宣公 四年)인 B.C. 605년의 일이었다.

<주례·대사마>에는 앉고 일어서고 나아가고 물러서며(坐作進退), 빨리하고 서서히 하고, 가끔 하고 자주하는(疾徐疏數) 절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중군(中軍)이 마상의 북인 비(鼙)를 울리도록 명령하면, 고인(鼓人)이 3번 북을 친다. 사마가 탁(鐸)을 흔들면 군리가 기(旗)를 일으키고, 전차와 보병이 다 일어난다. 북을 치면서 행진하고, 탁(鐲)을 울리면 전차와 보병이 다 움직여 표(表)에 이르면 그친다. 3번 북을 치고 탁(鐸)을 흔들면 군리들이 기를 쓰러뜨리고 전차와 보병이 다 제자리에 앉는다. 또 3번 북을 치고 탁(鐸)을 흔들면 기를 일으켜 세우고 전차와 보병이 다 일어서며, 북을 치면서 행진하고, 탁(鐲)을 울리면 전차는 달리고 보병은 뛰어가서, 표에 이르면 그치는데, 앉고 일어서는 것을 처음과 같이한다. 또 북을 치면 전차는 질주하고 보병은 달려나가 표에 이르면 그친다. 북을 쳐서 공격을 알리고 세 번 그칠 때, 전차에서 세 번 발사하고, 보병은 세 번 찌른다. 북을 치면 후퇴하고, 요(鐃)를 울리면 또한 물러나 표에 이르면 그치는데, 앉고 일어서는 것을 처음처럼 한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전쟁시에 금고와 깃발을 사용하였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유리왕(琉璃王) 11년(기원전 9년) 4월 선비를 굴복시킬 때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나아갔으며, 문무왕(文武王) 14년(674년) 9월 영묘사 앞길에서 군사를 사열하고 육진병법(六陣兵法)을 보았다. 태종 무열왕(武烈王) 7년(660년) 7월9일 신라와 백제가 황산벌에서 싸울 때, 품일(品日)의 아들 관창(官昌)이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싸우다가 사로잡혀, 머리를 베이고 말안장에 매달려 돌아오자, 삼군(三軍)이 이를 보고 슬퍼하고 한탄하여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자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송성섭 풍물미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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