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인천도예연구소의 녹청자 초벌구이 가스 가마.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유려한 빛깔도 시선을 사로잡는 광택도 없다. 원래의 흙색을 그대로 띠며 본래의 기능에만 충실한 녹청자 이야기다.

청자와 백자처럼 지방호족 등 부유한 계층이 사용하거나 장식용으로 활용됐던 도자기와 확실히 구분되는 녹청자는 과거 서민들을 위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녹청자에 대해 사료가 많지 않아 추정할 뿐이지만 신라 말∼고려 초(9~10세기) 귀족들에게 청자가 보급되는 과정에서 녹청 자기는 조선 시대 후기까지 서민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 백성들이 밥도 담고 반찬도 담아 먹던 실용적인 물건이라서 그런지 유약의 빛깔은 녹갈색과 암녹색으로 불투명하고 광택도 없이 소박하다.

하지만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소시민들의 그릇이 돼 주며 애환을 담아서인지 그 어떤 화려한 자기보다 고고하며 자연스러운 가치가 있다.

▲ 한국강화문화예술원 미술관에 전시 중인 녹청자.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이런 녹청자가 인천에서 출토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인천시립박물관과 국립박물관이 1965년 1년 동안 인천시 서구 경서동 국가사적 제211호로 지정된 도요지에서 4차례 이상 공동으로 발굴·조사해 녹청자의 파편 조각을 처음 발견한 것이다.

인천 서구 최초의 문화재이자 우리나라 특수 양식이 빛을 발하는 도요지는 일본이 자기네 기술이라고 자부했던 도요 기술을 반박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이기도 하다.

인천의 고유한 자산으로 손색이 없는 녹청자를 비롯해 인천만의 도자기 명맥을 이어가는 예술 공간 2곳을 찾아갔다.


 

[서인천 도예 연구소] 질박한 자태 녹청자 전통 방식대로 제작

정병석 도예가 '목 물레'로 작품 빚어
길이 7m·높이 1m 목재 가마에 넣어
30시간 1250도 이상 고열 가해 구워

▲ 서인천도예연구소 야외에 설치된 전통가마.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에 서인천도예연구소가 있다. 정병석 도예가가 녹청자를 굽고 작품을 전시하며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최근 조성한 곳이다.

이곳의 특징은 전통가마가 설치됐다는 점이다. 길이 7m, 높이 1m 규모로 낮고 길게 뻗은 이 목재 가마를 그는 정성 들여 만들었다.

1250도 이상의 높은 열을 고르게 가해 30시간의 인고를 거치고 나면 질박하면서도 은은한 자태를 머금은 녹청자가 태어난다.

특히 전통가마는 그 안에서 발생하는 재가 도자기 표면에 달라붙어 의외의 무늬와 예상치 못했던 굴곡을 남긴다. 이 세상에 하나도 같은 작품이 있을 리 없는 이유다.

녹청자를 이런 전통방식으로 구울 수 있는 시설은 현재 인천 서구 녹청자박물관에 있는 것 외에 이곳의 가마가 거의 유일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녹청자는 인체에 유익하다. 애초부터 망간이나 철 성분이 들어있지 않은 흙과 유약으로 자기를 만들고 이렇게 자연스러운 공정을 거치다 보니 음식을 담아두어도 잘 변질되지 않는다.

서인천 도예연구소에는 이런 녹청자 수백점이 전시돼 있다. 예술성을 갖춘 아름다운 작품부터 찻잔, 술병, 밥그릇, 국그릇 등 실생활에 쓸 수 있는 것까지 다양하다.

▲ 정병석 도예가가 '목 물레'를 돌리고 있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정병석 도예가는 나무로 만든 '목 물레'를 발로 돌리며 작품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 지금도 녹청자를 빚고 있다.

원광대학교 도예과를 졸업한 그는 화려하진 않지만 그 어느 자기보다 깊은 내공이 있는 녹청자에 반해 오랜 기간 녹청자 외길을 걸어 왔다. 그의 아내와 딸 역시도 원광대학교 도예과를 나와 온 가족이 같은 예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정병석 도예가는 “크게 주목받지 않는 녹청자 이지만 인천의 고유한 문화유산으로 지키고 전문성을 갖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강화에 시설을 마련했다”며 “앞으로 녹청자 후학을 양성하고 시민들의 흥겨운 체험 학습 현장까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강화문화예술원] 학생 떠나버린 폐교 도예 체험장 탈바꿈

우리 도자기 널리 알린 김미옥 원장
옛 초등학교 손봐 2000년부터 운영

재료 다루기부터 모양 구성까지 경험
두 차례 구워 완성되면 집으로 보내줘

▲ 김미옥 한국강화문화예술원 원장.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 김미옥 한국강화문화예술원 원장.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역시나 강화 화도면 덕포리 마니산 자락에 아름다운 한국강화문화예술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초등학교였다. 아이들이 떠나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채 버려진 폐교를 문화예술원으로 탈바꿈한 이는 김미옥 원장이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학과와 같은 대학원 공예도안과를 졸업한 그는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된 2000년부터 이곳을 도자기를 주제로 운영했다.

인천은 특히 도자기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서구 경서동에 녹청자 도요지가 있고 지금의 주안은 과거 유명한 점토 생산지였다. 서곶은 대규모 항아리 공장이 운영되고 강화 화도면 사기리는 예로부터 사기를 만들던 곳으로 유명하다. 여주나 이천에 버금가는 도자기 관련 유래와 명분이 확실한 인천에서 학생들에게 인천 도자기를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김미옥 원장은 팔을 걷어붙였다.

▲ 폐교를 활용한 한국강화문화예술원 내부 모습.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그는 한국도자기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도예연구소와 작품 전시가 가능한 미술관을 갖추고 학생 대상으로 체험학습장을 열었다. 빈 교실에서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녹청자를 비롯한 도자기 재료 다루기부터 모양을 구성하고 제작하는 과정을 스스로 해보도록 프로그램을 짰다.

대부분 현직 대학 강사들이 이들의 실습을 지도하며 짧은 일정이지만 전문적이고 유익한 도자기 체험이 가능하기에 호응이 높다. 초벌구이 후 유약을 바르고 다시 재벌구이해 3∼4주가 걸려 작품이 완성되면 가정으로 도자기를 보내주는 방식이다.

인천의 도자기 가치를 깨닫고 직접 만들기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완벽하게 마련된 한국강화문화예술원은 그 의미가 높아 학생뿐 아니라 직장인 단체들의 참여도 많은 정도다.

여성의 사회생활이 극히 제한됐던 1970∼80년대 뛰어난 수준으로 터키, 미국, 우즈베키스탄, 뉴질랜드, 이집트, 독일, 일본, 프랑스 등에서 초대받아 우리나라 도자기를 알린 김미옥 원장은 그 자체로도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는 “도자기는 과거와 현재, 신분의 귀천을 떠나 인간생활에서 필수 불가결한 생활용품이라서 가장 먼저 연구해야 할 대상”이라며 “인천의 유구한 도자기 역사와 깊은 유서를 지키고 제대로 전파하며 후세에도 이어지도록 애쓸 것”이라고 말했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인천일보·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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