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메운 “군부독재 타도” 외침, 6월 항쟁 불 붙였다

1986년 5월3일, 주안·제물포·동인천역 일대 5만여명 모여
백골단 폭력진압과 최루탄 속 '민주 헌법 제정' 목놓아 외쳐
검찰 129명 구속·60여명 지명수배에도 '민주화' 열기 활활

 

“다시 부르마, 민주주의여.”

1986년 5월3일 정오. 옛 남구(현 미추홀구) 주안동 시민회관 사거리를 중심으로 주안역, 제물포역, 동인천역 일대에 5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군부독재 타도”, “민주 헌법 제정” 등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백골단의 폭력 진압과 사방에서 쏘아 올린 최루탄에도 '민주주의'를 향한 연대 행렬은 지치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이날 저녁 10시까지 독재에 찌들었던 인천은 해방공간과 같았다.

군부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검찰은 이날 시위를 좌경용공 세력에 의한 체제 전복 기도로 단정했다. 형법 115조 소요죄를 적용해 129명을 구속했고, 60여명을 지명 수배했다.

이들은 굳셌다. “1980년 5월 전두환 일당에게 빼앗긴 이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민주화 시위이다”, “폭력은 경찰이 먼저 행사해 유도한 것”이라며 민주화 열기를 더욱 발산했다.

인천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성지요, 노동운동의 선구지이다. '인천민주화운동 의의 및 기념공간의 필요성'에 관한 연구용역에서는 인천 민주화 운동을 “한국 민주화운동이라는 보편적 흐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지만 지역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산업구조, 도시의 지리 문화적 배경, 계급과 계층 구성과 같은 요소도 인천지역 민주화운동의 특성”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35주년을 맞은 인천 5·3 민주항쟁은 응집된 인천의 '노동운동'으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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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부터 대량 해고 사태를 막기 위해 지역 내 노동운동 연대투쟁이 전개됐고, 이듬해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이 탄생시켰다. 인천 5·3 민주항쟁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 전국파쇼민중민주투쟁학생연합(민민학련), 서노련, 인노련 등 재야 단체와 시민이 모여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시도지부 결성대회'(인천지부 결성대회)가 열리는 1986년 5월3일 정오부터 오후 10시까지 5만명이 모여 1만명이 진압경찰에 맞서 전개됐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인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29일 “1985년 2월 총선에서 대통령직선제를 공약으로 내건 신민당이 승리하며 정국은 직선제 개헌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고, 신민당의 개헌추진지부 현판식 대회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민심이 폭발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인천 5·3 민주항쟁 후 전두환 군부는 대대적으로 구속, 수배, 고문 등 민주화운동 단체를 송두리째 뿌리 뽑으려 들었고, 무리한 탄압은 부천서 성고문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이어져 1987년 6월 항쟁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다. 결국 1980년 광주항쟁 발생 7년 만에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반환된 1987년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기념회는 “인천 5·3민주항쟁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요 시발점이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인천 민주화 운동은 굴업도핵폐기장 반대투쟁, 계양산살리기운동을 비롯해 선인학원 시립화투쟁 등으로 이어져 민주주의를 넘어선 자치운동, 마을만들기운동으로 확산됐다.

/이주영·김원진·이창욱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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