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서울대 대학원생으로 부평공단서 유인물 돌리다 경찰에 붙잡혀 9개월간 옥고…“민주화운동으로 평가 필요”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는 사람들로 도로는 마비됐고 여기저기서 최루탄이 날아다녔죠. 전쟁을 방불케 한 현장 상황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1986년 5월3일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일대에서 열린 인천5·3 민주항쟁에 참여해 주동자로 몰려 구속됐던 이종태(65·사진) 건신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한국교원대학교 조교이자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대학원 학생이었던 이 교수는 1985년 가을부터 반독재 민주화와 반외세, 노동해방을 위해 안양, 군포, 의왕을 기반으로 지역노동자 및 학생 10여명과 일주일에 1~2번씩 주기적으로 만나 토론하고 공부하는 모임을 운영하고 있었다 .

이때 쯤 신민당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임기가 끝나는 1987년이 다가오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전국 시도에 개헌 추진 지부를 만들고 현판식을 진행했다. 1986년 5월3일은 신민당 인천시당에서 개헌 현판식 행사가 예정된 날이었고, 이 같은 소식은 들은 이 교수는 지역 운동을 함께하던 동료들과 인천으로 향했다.

이 교수는 당시 주안동 일대가 마치 전쟁통이었다고 했다.

그는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외치는 수도권 지역 학생과 노동자, 시민 수십만 명의 함성이 일대를 가득 메웠다. 경찰들은 무차별로 최루탄을 쏘며 대치했고 도로는 마비됐다. 깨진 보도블록과 바닥에 가득했던 군사정권을 타도하자는 수십 종류의 유인물까지 전쟁 그 자체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 교수는 이날 항쟁에 참여한 후 당일 저녁 지역에서 노동자들과 부평공단 인근에서 반외세와 반미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다 경찰에 붙잡혀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소요죄와 국가보안법위반으로 1심에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받았다.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기까지 그는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에서 9개월간 수감됐다가 1987년 1월28일 출소했다.

이 교수는 “구속되면서 학교에서도 제적을 당했다. 다행히 6월항쟁 후 사면을 받아 복학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인생이 송두리째 멈춘 셈이었다“며 “나뿐만 아니라 투쟁했던 수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이 고문을 당하고 구속됐다“고 전했다.

그는 인천5·3민주항쟁이 전두환 독재정권을 흔든 시작이자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시발점으로 민주화운동으로서의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5·3인천민주항쟁은 독재정권에 큰 타격을 줬고 그 열기로 인해 6월민주항쟁에 이어 군부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며 “5·3인천사태가 아닌 민주화운동으로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끝으로 다시 1986년 5월3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인천에서 민주화를 외쳤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와 학생 중에는 화려한 정치인이 된 사람들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은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자신을 젊음을 바친 이들을 위해서라도 5·3인천민주항쟁은 제대로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도희 기자 kdh@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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