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교회로 항쟁 동참했다 주안역서 돌더미에 깔릴 뻔…“토박이 적어 조명 덜 받는 듯…박물관·기념관 제안 바람직”

1986년 5월3일. 주안역사 담벼락이 무너졌다. 이날 정오쯤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옛 시민회관 앞에서 자리를 튼 시위대는 경찰이 앞세운 최루탄에 서울지하철 1호선 주안역 일대까지 밀려났다. 매캐한 연기에 어쩔 줄 모르던 시위 참가자들이 담을 넘기 시작했는데, 담벼락이 이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돌무더기가 샘터교회 김성복(사진) 원로목사 발 앞에도 쏟아졌다. 한두 걸음 앞서 도망쳤다면 김성복 목사는 크게 다쳤거나 비명횡사했을 수도 있다. 인천5·3민주항쟁 당시 경찰 진압 과정은 이렇게 가혹했다.

김성복 목사가 인천 부평구 십정동에 샘터교회를 개척하고 3년째 되던 1986년 5·3항쟁 때, 시위 현장에 있었던 건, 그가 연세대 김찬국 교수와 서남동 교수에게 민중신학을 배운 탓이 크다.

김성복 목사는 “시위를 주도하던 단체가 있었고 대통령 직선제 쟁취에 뜻을 같이한 민중이 시위에 나섰다. 나는 이 가운데쯤 되는 위치였다. 직선제를 염원하는 신도들과 항쟁에 참여했다. 그날은 온종일 경찰에 쫓기는 날이었다. 최루탄이랑 돌멩이까지 아주 아수라장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5·3항쟁에 기독교와 민중교회 차원으로 동참했다. 전체적인 준비와 기획은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련) 등이 중심인 상황에서 김성복 목사는 정식 소속 신분은 아니었고, 함께 이야기할 사안이 있을 경우에만 참석하면서 시위 관련한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5·3항쟁 현장에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공통된 요구는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직선제를 하라는 거였다. 여기에 대한 저항이나 개혁 갈망이 인천에서 터진 셈”이라며 “이 항쟁이 기틀이 돼 1987년 민주화 투쟁이 꽃을 피웠다고 본다. 같은 해 대선 후보가 단일화했으면 하는 아쉬운 부분도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 2019년, 인생 절반 넘는 세월을 바친 샘터교회에서 은퇴한 김성복 목사는 3년 가까이 경기도 양평군에서 지내고 있다. 감자나 옥수수, 딸기를 키우는 농부로 살고 있다. 대부도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 인천으로 유학 오고 줄곧 인천 사람으로 있었던 그는 모처럼 외부에서 인천을 바라보는 중이다.

“아무래도 인천에는 토박이들이 많지 않아서 5·3항쟁이 비슷한 시기 있었던 여러 항쟁보다 조명을 덜 받는 게 아닌가 싶다. 꼭 이번 사안이 아니더라도 인천시민들 스스로 주체 의식을 높일 필요가 있다. 유신을 끝장낸다는 투쟁으로 큰 역할을 했던 것이 인천5·3민주항쟁이다. 역사적 가치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며 “최근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가족에게 취업 혜택을 부여하는 등 내용을 담은 법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보면 나라 기틀을 세운 큰 기둥 세 개가 있다. 항일 독립 운동가들과 산업화 과정에서 노력했던 노동계급, 현재 민주주의 체제를 만든 민주화운동 유공자다. 이들에 대한 예우를 소홀하게 하면 나중에 국가가 비슷한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나서겠느냐. 5·3항쟁 박물관이나 기념관 제안들이 나오는데 이런 맥락에선 바람직하다고 본다.”

/김원진 기자 kwj7991@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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