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학생 6·25 참전관' 외부 모습.


父子, 증언녹취 등 20년간 자료 수집
박물관 공식 등록 … 전문학예사 채용
6·25 학도병 소개책 '서해문화' 발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부족한 군인들을 대신해 전쟁터로 뛰어든 소년들이 있었다. '학도병'으로 불리는 그들의 나이는 지금으로 치면 고작 16, 17세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난 후 국가는 어린 나이에 청춘을 바친 학도병들의 희생을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았다.

국가유공자가 아닌 참전유공자로 인정돼 월 20만원의 수당을 받는 것이 전부이며 전사자 수 또한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당시의 역사를 증명하는 것은 46년 만에 날라온 '참전용사증' 뿐이었다.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학도병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20년의 여정을 걸어온 아버지와 아들을 만났다.

발로 뛰며 설립한 '인천학생 6·25 참전관'

 

▲ '인천학생 6·25 참전관' 내부 모습.


1호선 동인천역을 나와 신포시장 방향으로 쭉 걷다 보니 '인천학생 6·25 참전관'이 보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1층과 2층에는 6·25 학도병들의 이야기가 담긴 150평 규모의 전시관이 펼쳐졌고 3층으로 올라가 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이규원 원장을 만났다.

추모의 벽, 추억의 벽, 기억의 벽 등 세 개의 테마로 이뤄진 공간에서 오랜 세월 켜켜이 쌓아온 역사의 흔적들이 느껴졌고 '인천학생 6·25 참전관'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1995년쯤이었을 거예요. 아버지께서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6·25에 참전하신 이야기를 처음으로 자세히 듣게 됐고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친 학도병들에 대해 그 누구도 관심이 없다는 것에 허탈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먼저 기념사업을 제안했어요. 그렇게 인천 학도병들을 찾아 발로 뛰며 자료를 수집하러 다닌 지도 벌써 20년이 흘렀네요."

이규원 원장은 아버지 이경종 옹에게 녹음기와 사진기를 사드리고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하고 어린 나이에 청춘을 바친 학도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인천에 살아 있는 참전 학도병들을 처음부터 다 확인할 수는 없었어요. 한 분 두 분 만나면서 지금까지 연락하고 계신 학도병들을 소개받았고 그렇게 총 198명의 증언을 녹취했죠."

생존 학도병들의 증언뿐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사통지서, 제대 증명서 등의 자료 2500여점을 수집했다. 참전관 곳곳에는 빛바랜 사진들과 함께 학도병들의 사연이 담긴 글이 전시돼있다.

디지털 방식이 없던 시절부터 이경종 옹은 판넬 하나하나에 손수 자료를 붙여가며 학도병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규원 원장은 컴퓨터를 다룰 줄 몰랐던 아버지에게 워드 프로그램을 가르쳐드리며 참전관을 꾸리는 일에 동참했다.

어떤 지원도 없이 시작한 기념사업의 규모가 점점 커져 지난해 8월 참전관을 지금의 자리로 확장 이전했다. 인천시에 공식적인 박물관 등록을 마쳤으며 전문 학예사를 채용해 함께 일하고 있다. 참전관의 자료들은 개인이 기록하고 모았지만 가장 정확하고 방대하다는 평가를 받아 매년 국방대학원과 전문가들이 현장 수업을 위해 찾아올 정도다. 월세와 전세를 전전하다 개인 소유의 건물을 갖게 돼 기쁘다는 이규원 원장은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두 개층을 참전관으로 만들었다.

"3층에 있는 치과로 올라오려면 참전관을 거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보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죠."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바친 청춘

 

▲ 이규원 치과 원장


인천 상업중학교 3학년으로 학생의용대에서 활동하던 이규원 원장의 아버지 이경종 옹은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가세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300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육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부산까지 내려갔으나 제대로 된 군번조차 받지 못했고 19살이 되던 해에 진짜 군번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5년 만에 돌아온 고향의 친구들은 다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전쟁에 나가느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이경종 옹은 막노동과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향로봉 전투에서 다쳐 허리가 좋지 않았지만 먹고사는 일이 급해 이것저것 따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중매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고 세 명의 아들을 낳아 열심히 살았다.

자식 교육 또한 쉽지 않았지만 큰 아들 이규원 원장은 월등한 실력으로 치과대학에 입학해 의사가 됐다. 국가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청춘을 보상해주지 않았고 이경종 옹의 슬픔과 상처를 치유한 것은 이규원 원장의 효심이었다. 어느새 83세의 지긋한 노인이 돼버린 어린 소년은 매일 참전관에 나와 전쟁터에서 삶을 마감한 동료들의 넋을 기린다.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야 할 역사

 


'고향 인천을 지키기 위해 6·25에 참전해 전사한 인천학생 208명 이름이 이곳에 적혀있다. 몸은 피 흘리고 죽었어도 넋은 고향을 놓지 않아 그 넋들은 마르도록 우리들 곁에 있으리라' 이규원 원장이 직접 지은 시 '충혼(忠魂)'의 한 구절이다.

"아버지와 함께 학도병들의 증언을 듣다 보니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고향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야 했던 현실이 슬프게 다가왔어요. 전쟁으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잃은 셈이잖아요."

이규원 원장은 2007년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를 꾸려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서해문화>를 발간해 인천지역에 배포했고 지역의 여러 행사를 찾아다니며 학도병의 기록을 전시해 사람들에게 알렸다. 전시를 보고 본인의 부모님 또한 인천의 학도병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이들도 있었다.

"기념 사업을 하면서 안타까운 소식을 하나둘 접했어요. 후손도 없는 학도병들이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방치돼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국방부에 관련 자료를 제출해 이장(移葬) 했죠."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자라나면서 6·25 전쟁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고 있지만 이규원 원장은 앞으로도 인천 학도병들의 역사를 알리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인천학생 6·25 참전사를 기록한 <서해문화>를 책으로 총 4권 펴냈어요. 앞으로 10권을 목표로 계속 발간할 계획이에요. 훗날 6·25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청춘을 바친 학도병들이 있었다는 것을 꼭 알리고 싶습니다."


/글· 사진 김신영 기자 happy1812@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