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대학교 스포츠학과 교수  

이별은 누구나 한다. 이별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별은 늘 겪을 때 마다 힘겹다.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정든 사람과의 이별이다. 이별의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함께 공유했던 기억, 역사에 대한 아쉬움의 눈물이 아닐까 한다. 눈물은 곧 그들과의 기억이고 역사다. 그러므로 역사는 눈물로 표현되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쉬움을 토로하며 체육을 찾고 체육 속에서 현재의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체육사(體育史)다. 배경이 인천이라면 그것이 바로 인천체육사(仁川體育史)다. 연구는 인물(人物)과 시설(施設) 등 인천의 전부가 포함된다. 아무튼 이를 통해 의미를 찾고 의미는 교훈이 돼 삶의 지침이 되곤 한다. 그리고 그 의미가 더욱 짙게 다가오는 시기가 바로 시련기다. 시련기에는 다양한 고민이 진심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민족의 가장 큰 시련기가 일제강점기다. 그 시기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도 우리가 잊고 사는 위대한 인물이 있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이며 한용단(漢勇團)의 후원자이고 제물포 청년회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약한 민족운동의 주인공이다. 당시 그의 신분은 올곧은 시대의 대변자인 신문기자였다. 이미 언론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상을 매년 기자에게 수여하고 있다. 인천체육의 선구자(先驅者), 바로 파하(波荷) 이길용이다.

이길용 체육기자상은 올해로 26회 째다. 국내 최고 권위의 이길용 체육기자상은 한 해 동안 최고의 활약을 펼친 체육기자에게 주는 상이다. 이 상은 이길용의 놀라운 정신과 헌신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9년 처음 제정됐다.(연합뉴스, 2016년 1월20일) 서슬 퍼런 일제강점의 시기에 일장기를 신문에서 지웠다는 것 자체가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36년 8월10일, 베를린올림픽대회에서 손기정은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일제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국민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로부터 15일 후, 25일자 동아일보에는 손기정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가 지워진 채로 신문지면에 실린다. 이것이 바로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이는 손기정의 우승이 자신들의 공인 양 떠드는 일제에 분개하며 이길용(사진)이 주도한 사건이고 전속 화가인 이상범의 도움도 있었다.(손환, 2006: 18~21)

뿐만 아니라 그는 영화학교 야구팀의 매니저 역할도 했다. 즉 한용단이 활약하기 이전부터 인천야구의 불을 지폈고 인천야구가 기지개를 펼 수 있었던 이유가 모두 그에게로 시선이 쏠린다. 지금도 야구를 하려면 장비의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 일제강점기는 오죽했겠는가. 그 때 이길용의 투지와 배짱이 야구의 장비를 후원했고 그것이 기초가 돼 인천야구는 태동할 수 있었다.(인천광역시, 2014: 30~31) 인천야구의 시작과 한국체육의 중심에 모두 그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불과 며칠 전인 4월16일은 민족이 잊지 못할 세월호 사건 2주기다. 이와 비슷한 사고가 93년 전인 1923년 8월에 굴업도에서 있었다. 폭풍과 해일로 한반도 중북부가 엄청난 피해를 본 대사건이었다. 중북부의 주민 1254명이 사망, 혹은 행방불명됐고 가옥 1만6106호가 침수됐다. 특히 인천 굴업도의 피해가 가장 컸다고 한다.

이때 직접 현장에서 이를 기록한 특파원도 바로 그였다. 1923년 8월19일자 동아일보에는 "힘밋데까지 위문의 뜻을 표한 사실을 한시가 밧부게 보도하랴 하얏스나 뎐보나 뎐화는 그만두고 인편까지 끈어진 무변대해의 고독한 섬이라 하는 수업시 느짐을 미안히 녁인다(본보, 2014년 5월 9일)"며 그는 보도했다.

이길용은 진정한 저널리스트이자 독보적인 휴머니스트였다. 이런 정신으로 그는 한국체육과 인천체육을 선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약상은 자신이 활약한 인천에서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기록한 '느짐을 미안히 녁인다'는 글귀가 현대를 사는 우리의 가슴에 경종을 울린다. '교훈(敎訓)은 실천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이것이 그의 메시지다. /서해대학교 스포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