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선 도원역 - 제물포역 사이 30년이상 경력 목공소·목공예점 즐비
협동조합, 마을 환경개선 앞장 … 소통의 공간 '목공예센터·창작공방'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나무, 철, 천 등 다양한 소재들은 정성과 노력을 통해 실용성을 갖춘 가치 있는 물건으로 탄생했다. 여기에 미적인 감각이 더해져 하나의 예술품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장인'들에 의해 가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술의 발달로 손수 만든 물건의 의미가 사라졌다.목간판과 나무들이 거리에 줄지어 서있는 '인천시 남구 숭의 목공예마을'에는 한자리에서 긴 세월의 무게를 견뎌오며 나무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목공장인들이 있다.

30여 년 전 배다리에서 시작된 목공소와 목공예 공방들은 철길과 도로의 확장으로 도원동을 거쳐 숭의동에 자리잡았다. 지난해 12월 목공예 센터와 창작공방이 들어서면서 이곳은 목공예 마을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치열한 창작 과정과 삶의 흔적들로 채워져있는 장인들의 공간 그리고 지역주민, 목공 상인 공동체가 함께 하는 '숭의 목공예마을'을 찾았다.

숭의 목공예마을은 1호선 도원역과 제물포역을 사이로 3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목공 장인들의 목공소 16곳과 목공예점 10곳, 대장간과 톱을 만드는 가게들이 위치해 있다. 모두 나무를 다루는 곳이지만 가게 앞에 놓인 공예품들을 통해 각 가게의 특기 분야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목간판을 주로 만드는 인일 조각공예사, 집성목을 활용한 가구와 소품들을 만드는 한일공예사, 나무를 깎아 목선반과 야구방망이를 만드는 대우공예사 등이 있다.

시간이 흘러 가격이 저렴한 중국산 나무가 등장하면서 목공소들의 수입이 줄어들고 경쟁력은 약화됐다. 생활이 어려워져 숭의동을 떠난 목공소들도 꽤 많았다.

지난 2012년 남구에서는 역사와 문화자원을 간직한 숭의동 목공예 거리를 되살리기 위해 목공예 마을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 숭의 목공예 마을 협동조합을 주축으로 마을을 정비했고 지난해 12월에는 목공예 교육과 주민들의 소통을 위한 공간인 숭의목공예센터와 창작공방이 문을 열었다.

창작공방 1층 옆 작은 텃밭을 시작으로 '텃밭 가는 길'이라는 나무 표지판을 따라 골목을 걷다 보면 철길 옆으로 더 넓은 텃밭이 보인다. 동네 할머니들이 고추와 상추를 따며 밭을 가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목공소와 공방에서 일하는 이들은 대부분 숭의동이 아닌 타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목공예 거리 뒤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나무와 관련이 없지만 오랜 시간 목공소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먼지에 시달렸다.

조합원들은 주민들을 위한 마을 조성을 위해 가장 먼저 환경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힘을 합쳐 마을에 벽화를 그리고 우편함을 달았으며 텃밭을 만들었다.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던 주민들은 활기를 되찾았다.

박성화 숭의 목공예 마을 협동조합 이사장은 "주민들과 함게 텃밭에서 딴 상추로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하고 어르신들은 만나면 먼저 반갑게 인사해주신다"며 "마을의 분위기가 점점 밝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3년에는 꽃과 나무 의자로 가꾼 골목길이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에서 입선했다. 지역주민과 상인들의 자발적 참여와 문화적 가치가 드러나는 모습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목공예 센터와 창작공방에서는 매주 다양한 수업이 진행된다. 목공예 센터에서는 우드버닝과 목공기초, 가구만들기 등 목공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수업이 진행된다면 창작공방에서는 꽃차만들기, 가죽공예, 포크공예, 한지공예 등을 배울 수 있다.

공예와 목공이 협업해 새로운 목공예 특화 상품을 만드는 것이 교육 프로그램의 목표다. 앞으로 남부교육지원청과 협약을 맺어 중·고등학생들의 특기 교육을 진행하고 목공 상인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도 마련할 예정이다.

박승화 이사장은 "목공소와 공방들의 간판을 바꾸고 거리 입구를 마을의 특색이 나타나도록 꾸며 숭의 목공예 마을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목공은 현대적인 기술과 결합해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할 수 있는 미래가 밝은 분야"라고 말했다.

[마을을 지켜온 목공장인들]
나무일 30년 … "언제나 새로움 추구"


'한일공예사' 김종필씨

 

▲ '한일공예사' 김종필씨


백화점에 들어갈 화장품 선반을 의뢰받아 한창 만드는 중인 '한일공예사'의 김종필(55) 씨는 숭의동 목공소에 온 지 어느새 30년이 넘었다. 군 제대 후 목공일을 시작해 목간판, 가구 리폼, 소품 등 이제는 나무와 관련된 것이라면 뚝딱 만들어낸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손재주가 남들 보다 뛰어났다는 김종필 씨는 목공일이 적성에 맞았다. 주문 제작을 의뢰하는 손님들이 따로 도안이나 사진을 가져오지 않았을 때 그림을 그려 의견을 조율한다는 그는 최대한 손님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얼마 전 턴테이블 제작을 의뢰받았다며 순식간에 그림으로 보여주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어느 정도 틀을 갖춘 턴테이블의 모습은 완성된 자태를 보고 싶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정확하게 표현된 하나의 완성품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그는 항상 오전 6시에 목공소에 출근해 밤 10시에 퇴근한다.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는 25일까지 일이 꽉 차있을 정도로 숭의동 목공예 거리에서 가장 바쁘다.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해왔지만 매번 똑같은 것을 만들면 발전이 없고 흥미도 떨어진다는 김종필씨는 목공일을 하면서 항상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고민한다.

휴대폰 속에는 집에서 취미로 쓴 붓글씨 사진이 가득하다. 나무에 기교를 부려 글씨를 새기는 것이 그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다.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많이 가고 체력적으로도 힘든 목공일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도 이 일이 가장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남들과 똑같은 것은 싫다고 말하는 김종필 씨의 눈빛에서 목공에 대한 열정의 불씨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외길인생 53년 … "삶의 전부가 됐다"

'대우공예사' 원철성씨

 

 

▲ '대우공예사' 원철성씨


젖은 나무에 공예를 하는 것이 예뻐 보여 목공의 길에 들어섰다는 '대우공예사'의 원철성(68) 씨는 중학교 2학년 때 목공일을 시작해 올해로 53년째다.

1967년 백부의 소개로 공예사에 들어가 목공 기술을 배우다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소개로 인천 배다리의 성원공업사에 들어갔다.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삼익가구, 대우정밀 등 규모가 큰 회사에서 일을 하다 개인 사업을 해보고 싶은 마음에 1989년 '대우공예사'를 열었다.

15년 정도는 수입이 괜찮았지만 IMF가 터지면서 중국산이 들어오고 목공은 사양산업이 돼버렸다. 일거리를 찾다가 인터넷 사이트의 제품을 의뢰받아 제작하기도 했다.

원철성씨의 주특기는 원형 목기를 제작하는 목선반으로 나무를 깎아 둥글고 반질반질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로 학교의 계단 기둥이나 받침으로 사용된다. 인천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제작을 의뢰하러 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야구방망이는 근처에 있는 동산고, 인천고 프로 야구단이 생기기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인천의 야구 선수들은 대우공예사를 거쳐가지 않은 이들이 없을 정도다. 예전에는 미국에서 가져온 야구방망이를 선수들의 손에 맞게 수정해주기도 했다. 야구 광팬인 원철성씨는 당시 염경엽, 김성갑, 정민태 선수 등을 만나는 영광을 누렸다.

기계로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있지만 목공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하나의 완성품으로 만들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는 연령대가 높은 목공예 거리에 젊은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후배 양성을 꿈꾸고 있다.

원철성씨는 신비로움과 부푼 기대로 시작한 목공이 이제는 삶의 전부가 되었다며 지나고 보니 잘 할 수 있는 게 이것 뿐이라 오직 한 길을 걸어왔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신영 기자 happy1812@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