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 용정근린공원에 개관
주민 직접 기획 … 운영 참여
'마을 이름 유래' 등 전시 중


누구에게나 태어나고 자라온 동네는 그곳을 떠나도 기억 속에 다시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세월이 흘러 주변 풍경과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은 변해가지만 지역 특유의 느낌과 분위기는 역사라는 이름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희로애락을 함께한 마을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주민들이 힘을 합쳐 서로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인천시 남구 용현5동 용정근린공원에 위치한 '토지금고 마을박물관'은 지난해 10월 개관해 지역 토박이들이 직접 기획과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작은 규모의 파란색 컨테이너 두 개로 이뤄진 이곳에서는 마을의 역사와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토지금고 마을박물관'은 딱딱하고 어려운 공간이 아닌 한 편의 전래동화를 마주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하고 정겨운 곳이다.

지명의 유래에서 시작된 마을박물관

 


인천시 남구 용현2동과 용현5동은 예부터 용현동이라는 행정지명이 아닌 '토지금고'라고 불렸다.

택시를 타면 '토지금고'로 가달라고 해야 기사님들이 알아들을 정도였으니 용현2·5동을 의미하는 하나의 고유명사였던 셈이다.

토지금고의 시작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가 기업과 개인이 소유한 비업무용 토지의 효율적 활용을 유도하기 위해 설립한 공기업이 바로 토지금고다.

1976년 토지금고가 용현동에 있는 대우실업 소유 비업무용 토지 4만5000평을 매입해 구획을 정리하고 서민주택용지로 다시 매각하면서 그 지역을 '토지금고'라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토지금고라는 지명의 유래를 자세히 몰랐다. 특히 타 지역 사람들은 이곳에 진짜 금고가 있다고 생각했다.

인천시립박물관(관장 조우성)은 주민들에게 거주지에 대한 역사와 일상적 관심을 일으키기 위해 인문도시지원사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인문학 강좌를 시작했다.

근현대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풍부하지만 그 빛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남구 용현동 일대 '토지금고'가 인문도시지원사업의 첫 번째 지역으로 선정됐다.

용현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지난해 9월14일부터 10월12일까지 4주간 '토지금고를 열어라'라는 주제의 강의를 했다.

시립박물관 배성수 전시교육부장이 강사로 나서 인천의 역사와 문화적 특징, 남구의 정체성, 토지금고의 지명과 공간의 변화과정, 옛 길이 만들어 낸 공간 등을 소개하고 마을의 역사를 깊이있게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강의를 통해 '토지금고'의 역사를 제대로 알게된 주민들은 이웃과 마을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토지금고 마을박물관'을 기획했다.

주민들이 옛 앨범에서 꺼내온 사진과 직접 찾은 신문자료들로 박물관이 채워졌고 학생들도 박물관 꾸미기에 동참했다.

전시 뿐 아니라 교육 행사 등 운영의 대부분이 주민들의 힘으로 이뤄졌으며 현재 인문학 강좌를 수료한 용현2·5동 주민 10명이 마을박물관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10월19일 개관한 마을박물관은 개관전으로 염전, 매립, 토지개발 등 용현동 토지금고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적 특징을 담은 '토지금고를 열다' 전을 개최했다.

토지금고 이야기

 


행정구역상 '토지금고'는 문학산 산줄기 서쪽 끝자락에 해당되며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비랑리(飛浪里)'에 속한 곳이다.

사람들은 '비룡리(飛龍里)'나 '비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인근에 위치한 독정리와 통합돼 '용정리(龍亭里)'가 되었다가 광복이후 용현동으로 명명했다.

토지금고는 원래 대부분이 바다였던 곳으로 1929년 조선염업주식회사가 개량염전을 지었던 염전지대다.

당시 인근에 남동, 군자염전 등 천일염전이 지속적으로 늘어났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 단기간에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제염법의 필요성이 제기돼 이곳에 천일염전의 결정지와 간수창고 대신 대형가마 공장이 설치됐다.

해방 후 제염기술양성소가 자리잡았지만 1966년 폐염으로 주안염전과 함께 매각됐고 10년 후 토지금고에서 토지를 매입해 택지로 개발했다.

낮은 동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토지금고 일대에는 작지 않은 규모의 섬이 존재했다. 낙섬으로 알려진 이 섬은 모양이 원숭이를 닮아 '원도(猿島)'라고 불렸다.

조선시대 낙섬에는 '원도사(猿島祠)'라는 제단이 있어 서해바다 여러 섬들의 신위를 모아놓고 봄·가을로 산과 바다, 강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수령이 친히 행차해 제사를 주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71년 낙섬에서 옥련동 독바위까지 제방을 쌓아 임해관광도로를 건설해 도로가 이 섬을 통하게 되었고 결국 섬은 모습을 감췄다.

인천 서남부의 모든길이 토지금고를 통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곳은 인천과 타 지역을 잇는 통로 역할을 해왔다.

한때 토지금고는 육지 끝에 있어 외부로 나가기 힘든 폐쇄적인 공간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철길과 역이 생기고 고속도로와 터미널이 만들어졌다.

1968년 인천항의 확장으로 경인고속도로가 완공되고 인천항과 인접한 용현동이 고속도로의 기점이 됐다. 이후 경인고속도로 종점과 송도유원지를 연결하는 송도임해관광도로가 생겼다.

경인고속도로 개통 후 대부분의 대중교통이 철도에서 도로로 바뀌자 인천시는 버스터미널의 필요성을 느꼈고 1975년 금아산업주식회사가 경인고속도로 북쪽의 시험염전 부지 5000여평을 확보해 종합버스터미널을 준공했다. 이후 1997년 터미널이 남구 관교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인천시민들의 관문역할을 했다.

토지금고에는 아직 다양한 형태의 옛 건물들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경성화학주식회사의 사택과 관영주택 그리고 1970년대 보급된 국민주택도 볼 수 있다. 또한 초창기 아파트 양식인 저층 소형 아파트와 최신 유행의 고층 아파트가 공존해 토지금고의 역사를 엿볼수 있다.

1955년 3000여명에 불과했던 토지금고의 인구는 60년이 흐른 지금 5만명을 넘어섰다. 이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토지금고는 마을의 역사와 이야기가 묻어나는 고향으로 기억될 것이다.

[인터뷰 / 김승란·이민재 토지금고 마을박물관 큐레이터]
"이야기 전할 수 있어 뿌듯"

 


"토지금고는 경인고속도로 기점을 중심으로 용현2동과 5동으로 구분됩니다. 2동 주변은 산이었고 5동에는 갯벌이 있었어요. 살고 있는 동네의 배경과 역사에 대해 배우고나니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이해가 쉽더라고요. 지금 마을박물관이 있는 곳은 돌산 자리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토지금고 마을박물관의 큐레이터 김승란(67), 이민재(51)씨는 박물관 개관 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우연히 인문학강좌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마을박물관 기획과 전반적인 운영을 맡게된 김승란, 이민재씨는 토지금고의 옛 모습을 잘 알고있는 용현동 토박이다.

김승란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에서 용현2동으로 이사를 와 50년 이상 거주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토지금고에 처음 왔던 날 풍경이 그의 기억 속에 아직 남아있다.

"당시 동네에 황해도에서 온 어르신들이 많았던 기억이 나요. 용현2동에는 닭과 토끼를 기르는 집들도 많았고 모자원, 맹아학교, 황해중학교 등이 있었어요. 동네가 산 주변에 위치해 있어서 용마루라고 불렀죠"

마을박물관에는 이민재씨가 용현5동 주택가로 이사 온 날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사진 속에서 당시 토지금고에 새로운 주택이 들어서던 풍경을 볼 수 있다.

"박물관 전시에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집에 있는 앨범을 꺼냈어요. 제 이야기가 토지금고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역사로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새롭더라고요. 옛 기억을 되살려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마을의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어 즐겁고 뿌듯해요"

현재 김승란씨와 이민재씨를 포함한 10명의 큐레이터가 마을 박물관에서 활동하고 있다. 개관전을 시작으로 토지금고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를 기획할 예정이다.

"마을박물관의 처음 목적은 이웃들에게 동네의 역사를 알리자는 것이었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박물관을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져서 기뻐요. 세상은 하루하루 새롭게 변해가지만 역사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마을박물관을 통해 토지금고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어요"


/글·사진 김신영 기자 happy1812@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