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페 싸리재


경성가는 길목 동네 '중구 경동'
100년史 한옥에 문화공간 자리
고서·LP판 등 고풍스런 분위기


신포동에서 배다리로 향하는 길목, 인천시 중구 개항로 78번지 일대는 한 때 인천의 새로운 문화와 유행을 이끌어가던 중심지였다.

싸리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이유로 '싸리재'로 불린 거리를 기억하는 이들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화려한 골목길을 떠올린다. '싸리재'라는 이름이 붙어있던 상점들이 '싸리재약국'을 마지막으로 모두 사라지고 유일하게 그때의 시간을 간직한 공간이 다시 문을 열었다.

지금은 낯선 이름으로 다가오는 '싸리재' 간판이 달린 이곳은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카페 겸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나는 공간

 


2013년 8월 문을 연 '싸리재'는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카페이자 인문학 강의와 독서모임이 열리는 문화공간이다.

1층 벽면을 가득 채운 LP판과 턴테이블에서 울려 퍼지는 클래식한 선율의 음악은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게 한다.

쉽사리 LP판을 찾아보기 힘든 요즘, 싸리재에는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3000여 장의 LP판이 빼곡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책장에 꽂혀있는 고서(古書)와 문학 서적들은 이 곳을 찾는 손님들이 언제든 쉽게 꺼내볼 수 있도록 해 작은 도서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선반 위에 전시된 다양한 종류의 필름 카메라와 오디오 그리고 통나무 테이블은 옛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렇듯 '싸리재'는 지나간 추억을 되새기며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싸리재'에서는 개관식 이후 다양한 문화활동과 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한옥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가 강사로 나서 '한국의 집과 동네이야기'를 주제로 강연했으며 2층에는 빔 프로젝터가 설치돼 있어 영화 감상 후 감상평을 나누는 영화모임을 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싸리재' 안에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향은 일반 카페에서 맛보는 커피와 다르게 풍부하고 깊은 맛을 낸다.

주인 박차영씨가 기계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원두 가루를 내어 끓이고 손으로 거품을 내는 등 하나부터 열까지 수작업으로 커피를 만드는 방식은 신선하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옛 감성을 느끼고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공간 '싸리재'는 느림의 미학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한옥이 기억하는 '싸리재'의 역사

 

▲ '싸리재' 내부 모습.


지금의 '싸리재' 건물은 1910년대에 경기북부지방의 전형적 'ㅁ'자형 한옥으로 지어졌으며 1930년도에 한 층 더 올리면서 안채와 바깥채가 공존하는 형태를 갖게 됐다.

안채 중간에 올려진 건물은 아래층에서 올라갈 수 있으며 바깥채는 두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시대로 따지면 건물의 역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나 1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등기상으로는 1920년대로 기록되어 있지만 최초 등기 접수 시기가 1920년대 일 뿐 건물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들은 오랜 시간 이 자리를 지켜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공간은 1995년 박차영씨가 건물을 매입해 거주지와 의료기 판매를 위한 장소로 활용해왔다. 그러다 지난 2013년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개보수 작업 당시 처음으로 위층의 나누어진 공간과 천정을 뜯으니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이 쓰여진 상량문이 남아있었고 벽면에는 벽지가 아닌 흙을 개워 바른 오래된 신문지가 그대로 붙어있었다.

건물에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한 결과 1930년 4월 5일 오후 3시에 상량식을 했으며 이후 옷감을 파는 포목전으로 쓰였다.

최근 '싸리재'에 오래전 이 건물에 살던 어르신 한 분이 찾아왔다. 어르신의 아버지는 강화도에서 크게 직물공장을 운영해 번 돈으로 이 곳에 잡화전을 열고 다양한 생필품을 팔았다.

어르신은 주변 거리를 보고 옛날 그곳이 맞는지 긴가민가했지만 건물의 외관을 보고 기억을 되살렸다.

시기상 잡화전으로 시작된 공간은 포목전을 거쳐 지금의 '싸리재'로 자리 잡았다. 카페로 운영 중인 '싸리재'가 상업공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경동(京洞) 싸리재 고개

 


'싸리재'의 행정명은 '경동(京洞)'으로, '경성(서울)가는 길목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일제에 의한 강제 개항 이후 인천은 서구문물 유입의 통로로 각 나라 상품의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고 인구가 날로 급증하며 서울의 관문으로 통행이 빈번해 새로운 고갯길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싸리재 고갯길이라고 전해진다.

3리나 되는 긴 고개라는 뜻의 삼리재고개라고도 불렀으며 싸리재는 싸리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1920년대 말을 전후로 지금의 동인천 배다리와 경동사거리, 신포동에 상권이 형성됐으며 특히 싸리재가 가장 중심지였다.

초기에는 포목전과 양화점이 성업했고 1952년 근처 율목동에 기독병원이 들어선 후 약국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후 서양식 예식장인 신신예식장과 애관극장, 중국집, 작은 음악다방, 당구장 등이 들어서면서 사람이 늘 붐볐다.

당시 인천에서 품격있게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면 다들 신신예식장을 찾았다. 인천의 웨딩문화가 시작 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일하게 당시 극장 중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애관극장은 영화 상영과 함께 미스터 유니버스 선발대회, 국정 홍보, 음악 연주회 등이 개최되기도 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의 집합소였던 싸리재는 최고의 오락거리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다방에서 DJ가 음악을 신청받고 LP를 틀어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번성을 누리던 거리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도심 개발로 인해 점차 잊혀졌고 이 곳을 찾는 발걸음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문화와 유행을 선도했던 싸리재 거리가 인천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문화 중심지로 되살아나기를 바래본다.

[인터뷰 / 박차영 '싸리재' 주인]
"옛 싸리재 거리 되살아나 예술공간 자리잡았으면…"

 

 

 

 

▲ 박차영 '싸리재' 주인


"택시를 타면 일부러 개항로가 아닌 싸리재에 가달라고 말해요. 대부분의 택시기사들은 거기가 어디냐며 알아듣지 못하는데 10년 전만 해도 어디서든 택시를 타고 싸리재로 가달라고 하면 쉽게 찾아갔어요."

'싸리재'의 주인 박차영(사진)씨는1950년 인천시 동구 송현동에서 태어나 율목동을 거쳐 인천에 계속 살아온 토박이로 어린시절의 싸리재 거리를 누구보다 가장 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옛 싸리재 거리를 되살리고 싶은 마음에 싸리재라는 이름을 붙인 공간을 열기로 결심한다.

"2012년도쯤 스스로 인생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때라는 생각에 배낭을 들고 여행을 떠났어요. 도보여행을 하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었고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죠."

지금의 싸리재에서 경기의료기를 운영해 오던 그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고민을 끝없이 해왔다. 여행을 통해 내린 결론은 현실을 도피할 것이 아니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 때는 집이 오래돼 무너질까봐 빨리 부셔야 하나 고민도 했어요. 싸리재를 만들기 위해 리모델링을 시작 하기 전에는 이 한옥이 가진 역사에 대해 전혀 몰랐죠. 4개월이라는 긴 공사기간을 거치고 나니 전통과 역사를 이어가기 위한 결심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싸리재에서 볼 수 있는 옛 역사가 담긴 물건들은 그가 취향에 따라 모아온 개인 물품과 기증받은 것들로 채운 것이다.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다양한 시기의 책들이 모여있어요. 아주 오래 된 책들은 저희 아버지가 보시던 거에요. 제가 태어난 지 3년 후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기억속에 거의 없지만 책을 좋아하셨던 분이었어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자 직접 보시던 책들을 이곳에 모아뒀습니다"

그는 싸리재를 찾는 젊은 친구들이 새로운 분위기를 경험하고 기뻐하며 돌아갈 때 뿌듯하다며 이 곳에 담긴 추억과 역사를 이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제가 특별히 문화활동을 기획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싸리재라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 자체로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싸리재를 시작으로 이 거리가 되살아나고 다양한 예술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자리잡았으면 좋겠어요.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건물에 공방이 들어올 수도 있고, 공모를 통해 예술작가들의 작업장으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글·사진 김신영 기자 happy1812@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