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야구 100주년을 맞으며 / 이인수 체육부장
지난 17일 필자는 귀한 손님들을 맞이했다.
우리 나라 야구사의 산증인이자 인천야구 전성기 시절 당시의 주인공들인 박현식씨를 비롯하여, 김재은·주세현·김만근·박기련·고철호·이규정씨 등 인천의 대표적인 인천고·동산고 출신 원로 야구인들과 귀중한 자리를 함께 했다.
내년이면 우리 나라에 야구가 들어온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따라서 귀한 이분들을 모시고 ‘야구사 100주년 기념’ 좌담회를 통해 ‘야구 발자취’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한국 야구 100주년’이 곧 ‘인천 야구 100주년’이기에 더욱 뜻깊은 의미가 있었다.
이분들과 야구 얘기를 나누다 보니까 우리 나라 최초 야구도입 시기에 다소 의견이 엇갈렸다. 일부 야구인은 우리 나라 야구 도입이 1905년으로 돼 있는 대한체육사 기록을 최초 도입시기로 보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대한제국 시절인 우리 나라는 일본제국과 을사조약을 체결하며 신기한 외세문물로만 여기던 ‘야구의 역사’가 이때 시작됐다고 했다.
개화기라고 불리던 그 당시 서양문물이 들어오던 중 기독교문화가 정착되면서 1901년 YMCA(황성기독교청년회) 개척간사로 한국에 파견된 미국 선교사인 질래트(Philip L Gllat)가 1903년 YMCA를 설립하고 1905년 청년들에게 서양운동인 야구를 전수한 것이 한국야구의 시조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 야구인은 1899년에 야구가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이는 1895년 인천서 개교해 1904년까지 존립했던 인천고 전신인 인천영어야학회 1학년에 재학 중인 일본인 후지야마 후지후사가 기록한 1899년 2월3일자 일기에 ‘야구놀이란 서양 공치기를 했다’는 내용의 글이 실려 야구가 이미 인천서 일본인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근거로 입증해 보였다.
필자는 정리하기가 힘들었다. 과연 우리 나라 최초의 야구 도입 시기는 언제인지, 정확하게 독자들에게 알려주길 바랬지만 100년이 넘는 오래된 일이라 나름대로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어쨌든 대한야구협회는 대한체육사 기록에 따라 1905년도를 도입시기로 하고 있어 이 시기를 기준으로 현재 프로야구단 인천 SK와이번스가 ‘한국 야구 100년사’를 집필하고 있다.
또 ‘명문고’ 인천고도 야구활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인천 야구 100년사’ 집필과 이에 따른 행사계획을 인천야구동문회를 중심으로 준비하고 있다.
이왕지사 어려운 일이겠지만 야구사를 집필 중이라면 모든 방법을 동원, 정확한 한국 야구 도입시기를 찾았으면 한다.
인천은 야구 발상지답게 ‘야구도시’로서 지난 50년대부터 그 명성을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내년은 인천 야구 100주년을 맞는 해인 만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몇 가지 말해두고 싶다.
먼저, 새로운 집행부가 구성 되는 내년에는 인천시야구협회가 좀 더 선후배들 간에 화합과 단결력을 보여 ‘인천야구의 중흥기’를 맞는 새로운 해로 도약했으면 한다.
또 초등학교 야구는 선수 부재로 일부 팀 해체 등 침체기에 들어서 있다. 어린 꿈나무들의 사기와 희망은 곧 인천야구의 명성을 이어간다. 일부 타 시도 처럼 지역 환원 차원에서 향토기업 등의 적극적인 관심과 든든한 뒷받침이 요구된다.
여기에 어린이들과 가족들이 자주 찾는 인천대공원에 ‘리틀야구장’을 마련하는 것도 큰 힘이 된다고 본다. 어린이들은 공원에 나와 즐기면서 야구도 관람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부지가 있어 그리 큰 예산은 들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동안 신생 고교야구팀을 창단하려고 시와 야구협회가 부단한 노력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구체적인 대안을 세워 평준화 된 4개 고교야구팀이 존재하는 인천 고교야구의 안정된 ‘틀’을 만들었으면 한다.
이들을 성사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꼭 안된다는 법도 없다. ‘인천 야구 100주년’을 맞는 희망찬 새해를 기점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목표를 세워 하나하나 달성해 나간다면 ‘구도(球都) 인천’의 빛은 영원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