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전각·서각 작품 활동 활발
한화리조트 용인 배잔송서 초대전
“화엄석경 작업은 재미 아닌 운명”

“재미있어 글씨를 썼고, 전각을 했고, 서각도 하고 모든 게 다 너무 재밌습니다.”

 

 

오는 25일까지 한화리조트 용인 배잔송에서 초대전 '춘광동(春光動), 봄빛이 피어나다'를 연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박여 김진희 작가의 말이다. “내가 작가니까 작품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1959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난 김 작가는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아 초대작가가 됐을 뿐만 아니라 동아미술제에 출품해 동우회원이 됐다. 현재 성균관대 양현재에서 서예를 지도하고 있으며 용인시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 작가의 예술의 뿌리는 서예다. 서예의 기본요소인 '획(劃)', '결구(結構)', '포치(布置)' 등이 그대로 전각과 서각에도 적용된다. 재료와 도구만 다를 뿐 글씨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서예가 종이 위에 붓으로 글씨는 쓰는 것이라면 전각은 돌판 위에 전각칼(철필, 쇠붓)로 글씨를 새기고, 서각은 나무판 위에 서각칼로 글씨를 조각한다.

김 작가는 “글씨의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온고지신(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다)'이라고 할 수 있다”며 “단순히 잘 쓰면 아름답지 않으냐고 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명필인 왕이지도 자기 혼자 써서 잘 쓰는 글씨가 아니고 선대의 글씨를 두루 섭렵해서 이를 조합해 자기의 아름다움을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어릴 적 서예를 하겠다는 뜻은 없었다. 그저 형·누나가 학교 실기수업에 쓰던 붓을 물려받아 글씨를 썼는데 “재밌었다”고 했다.

김 작가는 “중학생때 남의 대문 앞에 떨어진 붓 한 자루가 기억이 생생하다”며 “이 붓이 이전에 물려받아 쓰던 붓하고 너무 달랐다. 그때 글씨를 잘 쓰진 못했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글씨가 써져 글씨에 취미를 붙였고 신문지 위에다가 그냥 따라 했다”고 말했다.

전각은 1986년 대학에 들어가서 접했다.

그는 “고등학생 당시 우연히 본 평보 서희원 작가의 작품집의 뒤쪽에 전각이 있었는데 너무 아름다웠다”며 “언젠가는 전각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대학생 시절 지도 교수가 전각을 하신 분이어서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창때에는 측관을 화두로 삼아 공부했다. 측관은 '측면에 관지한다'는 뜻으로 작품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언제 어디서 했는지, 작품 연유가 뭔지를 기록하는 행위다.

그는 “측관은 그 좁고 세밀한 공간에 돌이 깨져 나간 모양이라든가, 획이 만들어지는 행위가 딱 계산된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파는 가운데서 이뤄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매우 컸다”며 “붓글씨를 쓸 때도 측간의 분위기를 살리는 등 이를 한참 화두로 삼고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너무 날카롭고 너무 각지고 뾰족하고 이랬던 글씨들인데 아직도 완성은 안 돼 진행형이지만 처음보다는 매우 부드러워졌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운명처럼 다가온 작품 화두가 있다. 화엄석경이다.

김 작가는 “1999년 어느 겨울 새벽, 각 작업을 하던 중 고개를 들어 창문을 봤는데 화엄석경이 떠올랐다”며 “제가 무슨 종교인이라든가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든가 그런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나에게 날아왔다”고 말했다.

이 순간부터 화엄석경 작업은 그의 목표가 됐다. 처음으로 재미가 아닌 운명을 택했다.

이후 금강경과 묘법연화경을 작업해 각각 2008년 4월 예술의전당 서예관과 2014년 7월 대구 동화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법화석경 작업은 30cm×30cm 돌판에 200장 분량을 새기는 방대한 프로젝트였다.

이 경험은 모두 화엄석경을 위한 과정이다.

그는 이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추정 작업기간만 15년인 데다 작업비용도 문제였다. 생계마저 걱정할 때도 있었다.

결론은 과거, 현재, 미래인 3세였다.

그는 “어느 날 나무를 자르면서 톱밥이 묻어서 터는데 3세라는 말이 딱 지나갔다”며 “과거, 현재, 미래인 3세가 모두 한세상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걸 하고 있지만 그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셈이다. 그렇지 않고는 해답이 없다. 화엄석경을 해야 한다는 것도 다 그 범주다. 그다음부터 마음이 편안해졌다. 현세에서 못하면 다음 인생에서 하면 된다”고 말했다.

/최남춘 기자 baikal@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