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병율 시인
▲ 주병율 시인

내 누님같이 생긴 꽃아 너는 어디로 훨훨 나돌아 다니다가 지금 되돌아 와서 수줍게 수줍게 웃고 있느냐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꽃아 순아 내 고등학교 시절 널 읽고 천만번을 미쳐 밤낮없이 널 외우고 불렀거늘 그래 지금도 피 잘 돌아가고 있느냐 잉잉거리느냐 새삼 보아하니 이젠 아조 늙어 있다만 그래도 내 기억속엔 깨물고 싶은 숫처녀로 남아 있는 서정주의 순아 나는 잘 있다 오공과 육공 사이에서 민주와 비민주, 보통과 비보통 사이에서 잘도 빠져 나가고 있단다 그럼 또 만나자

 

▶이 시는 서간문 형식을 띠고 있는 혼성모방의 시다. 서정주의 '부', '국화 옆에서', '사소 두 번째의 편지 단편' 등 여러 작품에서 이미지를 발췌하여 쓰인 시다.

근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가치 규범적 질서라고 외쳤던 중심언어, 중심 사유들이 은폐하고 있던 허위의식을 직시하면서 심한 회의와 좌절을 희극적으로 그려낸 시다. 이는 비단 우리 사회만 안고 있는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적 현상들이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다원주의, 또는 다원주의적 세계의 확산을 부르짖는 목소리들이 비등했던 시절이었다. 인간의 의식이란 항상 그 시대상과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축적되는 것인 만큼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순수자아가 세속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희극적이고 풍자적으로 노래한 이 시는 인간의식의 부박함을 함께 질타하고 있는 시이기도 하다.

그의 사유와 시적 담론들이 후학들과 한국 시문학에 던지는 파장은 절대 만만치 않다.

오래도록 투병을 하고 계시던 사실은 직접 알았으면서 얼마 전 동료로부터 당신께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고단한 일생의 삶을 마무리하시고 조용히 소천하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당신의 생전 모습도 새기지 못했다는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신의 삶도 본모습으로 스스로 거둬들일 만큼 당신의 성정과 삶은 담백했고 소탈하셨다. 선생님의 시편을 펼쳐 들고 읽으며 내 사유의 깊이가 일천함을 탓해보는 3월 흐린 날 아침, 마당 한쪽에서 때를 거르지 않고 노랗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산수유 꽃처럼 평소 눈가에 서글서글하게 맺히던 선생님의 웃음과 언제나 말씀이 없던 잔잔한 모습도 노란 산수유 꽃처럼 때를 거르지 않고 내내 그리워질 것이다.

/주병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