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 산양이 절벽을 건너뜁니다

 

늙은 등 징검다리 어린 굽이 지르밟고

 

도약을 받친 낙하가 가문을 지켜냅니다

 

건너간 초원에선 무성히 풀 뜯는 소리

 

다음 벼랑 만나도 차례 없는 차례로

 

공중은 부양 구름판 등덜미 떠받칩니다

 

 

▶현대시조 한 편을 소개한다. 김양희의 '징검등'이다. 제목이 '징검등'이다. 징검다리나 징검돌은 들어봤어도 징검등은 왠지 생소하다. '징검등'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의 매개가 '돌'이 아니라 '등'으로 한다는 것으로 김양희 시인이 만든 조어(造語)이다. 산양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험준한 바위 절벽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절벽을 건너뛰어 다니면서 식물의 풀과 연한 줄기를 먹는다. 한 무리의 산양이 절벽을 건너뛰는 장면에서 시인의 시선은 어미 산양의 '등덜미'에 주목한다. 벼랑을 건너야만 먹을 수 있고 살 수 있는데 어린 산양은 도약하는 탄력이 약하다. 그래서 어린 산양이 건널 수 없는 절벽을 맞닥뜨리면 어미 산양은 기꺼이 자신의 등덜미를 내어준다.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등'은 땅바닥이 아니라 '공중'에 놓인다. 새끼 산양이 도약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이와 길이만큼 공중에 '덩덜미'를 내어주고 자신은 깊은 낭떠러지로 낙하한다. 그 제어된 고통 속에서 시인이 보는 것은 절망과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딛고 일어선 희망이다. “도약을 받친 낙하가 가문을 지켜냅니다”라는 시구가 슬프면서도 숭고한 이유이다.

이렇듯 시인의 탁월함은 삶과 죽음의 실존 양식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된다. 삶과 죽음은 서로에 의지하여 형성하는 상호의존적인 것이다. 불교 화엄경에서 말하듯이 세계존재의 원리는 삼세(三世)의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의 생명이나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나 신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세 간의 인과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듯이, 삶은 고통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폐허 속의 어둠과 절망을 뚫고 일어나는 끈질긴 생명력을 환기하는 시인의 통찰에서 우리는 생탄(生誕)의 경이를 느낄 수 있다. 어둠은 어둠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고통은 더 큰 고통으로서 위로 될 수 있는 법이다.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눈물 같은 것이다.

▲ 강동우 문학평론가<br>
▲ 강동우 문학평론가

/강동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