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범준 사회부장.<br>
▲ 박범준 사회부장.

지난 7일 '인천 미추홀구 전세 사기 사건'의 선고 공판이 열린 인천지법 법정에서 오기두 판사가 118쪽 분량의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오 판사는 “피고인들 범행은 나이 어린 사회 초년생과 신혼부부, 70대 노인과 같은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상대로 해 그 수법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이 사건 주범인 건축업자 남모(63)씨를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오 판사는 “피고인은 2708채에 이르는 주택을 소유하는 탐욕으로 막내 자식뻘인 젊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 것에 큰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피해자들의 살아갈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고 지적했다.

남씨는 이날 사기죄의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과 범죄 수익 115억5678만원 추징을 선고받았다. 공인중개사와 중개보조원 등 공범 9명에게는 각각 징역 4∼13년이 선고됐다. 사기죄 법정형은 징역 10년 이하이지만 남씨와 같이 2건 이상 사기를 저지른 피고인에게는 '경합범 가중 규정'에 따라 법정 최고형에서 최대 2분의 1까지 형을 더할 수 있다.

그러나 오 판사는 이 같은 사기죄 형량이 사회적 신뢰를 망가뜨리는 악질적 사기 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하는 데 매우 부족하다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청년과 서민들이 피와 땀으로 일궈낸 전 재산인 임대차 보증금 148억원을 가로챈 전세사기범에게 내릴 수 있는 형량 상한선이 너무 낮다는 의미였다. 남씨는 주택 임대차 거래에 관한 사회 공동체 신뢰를 처참하게 무너뜨렸고, 그에게서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4명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오 판사는 이례적으로 판결을 통해 “이번 전세 사기처럼 '집단적 사기 범죄'에 적절한 처벌이 이뤄질 수 있도록 법률을 제정해 달라”는 제안까지 했다.

앞서 대검도 대규모 전세 사기 등 다수 피해자를 상대로 한 사기 범죄의 피해액을 합산해 가중 처벌하는 내용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을 입법 요청한 상태다. 현행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은 피해자별 피해액이 5억원을 초과해야만 가중 처벌할 수 있도록 해 소액 피해자가 많은 전세 사기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이에 따라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이 지난해 4월 이런 내용이 담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10개월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국회에 계류돼 있다.

서민을 타깃으로 한 경제 범죄는 점점 지능화하고 조직화하고 있다. 이를 규제하는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면 범죄는 기승을 부리기 마련이다. 더 많은 서민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강력한 처벌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특히 전세 사기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국회가 책임감을 갖고 하루빨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아울러 전세 사기 범죄와 관련한 신속한 피해 회복도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는 전세 사기 사건 1심 선고 직후 인천지법 앞에서 “남씨 일당에게 조직적 사기를 당한 피해자는 수천 세대에 이르는데 형량은 너무 낮다”면서 “이들의 사기 행각 전모를 낱낱이 밝히고 범죄 수익을 반드시 몰수·추징해 피해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집을 살 형편이 안 돼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서민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전세 사기가 재산적 탐욕에 기인한 '경제적 살인'으로 비유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선량한 사람들이 각종 불법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정부와 관계 기관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박범준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