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칼럼] 결정장애 그리고 불임(不姙)사회 
[정기환 칼럼] 결정장애 그리고 불임(不姙)사회 
  • 정기환
  • 승인 2019.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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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지난 주 인천 중구 인천지방해양수산청 앞에서 진귀한 풍경이 벌어졌다. 중장년의 남성들이 나란히 삭발까지 하며 인천해수청의 '갑질 행정'을 규탄한다고 외쳤다. 인천지역 바닷모래 채취 종사자들의 '생존권 사수 결의대회'였다. 강성 노조도 아닌데, 평범한 생활인들의 삭발이 눈길을 끌었다.
바닷모래는 90년대 초 처음 뉴스를 탔다. 노태우 정부가 분당·평촌·일산 신도시 건설에 드라이브를 걸면서다. 건설 물량이 쏟아지자 강모래 골재가 달렸다. 바닷모래까지 동원됐지만 염분 세척도 없이 아파트를 세워 올렸다. 이후 아파트 외벽에 흰 꽃이 피는 '백화 현상'이 이슈가 됐다. 60년대의 와우아파트 붕괴를 떠올리는 괴담까지 횡행했다.

인천 앞바다의 바닷모래 채취는 오랜 논란거리다. 어민들이 수산자원을 고갈시킨다며 반대해서다. 그러나 바닷모래 없이는 건설 현장이 돌아가지 않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골재대란도 심심치 않게 빚어졌다. 한동안 북한산 모래로 메웠으나 이마저 끊겼다.
바위를 깨는 파쇄 골재도 한계에 부닥쳤다. 주민 민원을 감당 못해서다. 외국에서 수입하면 된다는 얘기도 있었다. 물류비도 물류비지만, 다른 나라 자연환경은 아무래도 좋으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온 사방이 조용하면 도장 찍겠다
그래서 정부는 지난해 총리실 조정으로 바닷모래 채취를 재개키로 했다. 이에 따라 인천시는 옹진군 해역 7개 광구에서 2023년까지 1785만㎡의 바닷모래를 채취할 수 있다는 지정고시를 했다. 관련 단체들과의 사전 협의를 포함한 해역이용영향평가보고서 제출 등의 조건이다.
거의 4년째 일감을 잃었던 인천 바닷모래 업계는 반색했다. 직원들을 내보내고도 줄도산 위기에 몰려 있었다. 인천해수청이 추천한 단체장들의 의견을 듣고 서명을 받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3차에 걸친 보완 지시도 따랐다. 그러나 인천해수청은 또 하나의 장애물을 들이댔다. 추천인 6명이 함께 서명한 한장짜리 '합의서'를 내라는 것이다.
모랫배도 뱃사람들이라고, 심하게 열을 받았다. 9개월간 숨바꼭질 시켜놓고서 다시 뺑뺑이를 돌린다는 것이다. 규정에도 없는 합의서는 뭐냐는 거다. 차라리 그냥 '해주기 싫다'고 하라는 것이다. 도장을 움켜쥔 인천해수청은 요지부동이다. 합의가 없으면 바닷모래고 뭐고 없다는 거다. 온 사방이 조용하도록 합의해 와라, 그러면 도장을 눌러 주겠다. 그런 행정은 중학생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나.

#정부가 제 할 일 안하면서 호통만 치니
금융위원장과 벤처 기업인간의 설전이 겹쳐 떠오른다. 차량 공유사업을 두고서다. "혁신의 그늘을 살피는 게 중요하다"고 하자 "혁신엔 승자와 패자가 없다"고 응수했다. 이 기업인의 마지막 멘트는 이랬다. "정부가 제 할 일을 안 하면서 왜 그걸 비난하냐고 호통만 치고 있다." 과거 이건희 삼성회장이 "우리 정치는 3류"라고 했다가 혼쭐이 났다. 이전 같으면 감히 쳐다도 못 볼 고관대작에게 할 말을 다 했으니 그 용기가 가상하다. 관존민비도 소용없는 혁신의 시대인가.

#짜장이든 짬뽕이든 결정을 해야
우리는 지금 결정장애의 시대로 가고 있는가. 온 세계가 혁신 타령이지만 우리만 주춤거리거나 한 발 빼놓고 있다. 조금이라도 반발이 있으면 없었던 일이 된다. 애써 혁신의 씨앗을 뿌려도 싹이 트지 않으니 그 씨앗을 다시 파내 외국으로 나간다. 정부와 공무원은 모래밭에 몸을 파묻고 가자미 눈만 내밀고 있다. 이대로 가면 '마차가 더 낭만적'이라며 자위하는 대한민국이 될 판이다.
결정장애는 인천에도 있다. 국내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중고차수출은 터를 못찾아 인천을 떠날 판이다. 화물공영주차장 하나 결정 못해 갓길마다 덤프트럭이 잠을 자고 있다. 서울에도 있다. 그 간단한 아라뱃길~한강 유람선조차도 결정장애에 묶여 있지나 않은지.
결정장애는 결국 아무 생명도 잉태하지 못하는 불임(不姙)사회를 낳는다. 짬뽕이든 짜장이든, 아니면 짬짜면이든 어서 결정하고 주문을 내라. 저기 주방 안에서는 면이 불어 터질까 주방장이 애간장을 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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