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바로잡고 기록해준 그들, 덕분에 인천의 내일을 지킵니다

 

▲ 세분의 인천 역사가가 지은 저서들.


얼마 전 박상문 대표가 운영하는 명문미디어 아트팩에서 만든 이희환 문학박사 저서로 <靑年 金九가 만난 仁川, 사람들> 책 출판 기념회가 있었다.

역사를 깊게 연구한 토대로 소설을 쓰기로 유명한 이원규 소설가의 축사에서 사실을 드러내는 내용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사제 간 이어서 더욱 대견해하는 기쁨을 말한다. 작가의 수없는 발걸음으로 백범선생과 인천 사람들의 증거를 찾아 기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80년대 인천 양조장 가정집 서너 평 되는 책방에 자주 오시던 이훈익 선생님이 농협에 근무 하시면서 옛 문헌을 토대로 인천 자료를 채집하던 이야기를 해주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육로가 아닌 섬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시면 미처 나오는 배 시간에 마치지 못해 또다시 그 다음 주에 들어가던 일, 사람을 못 만나거나 증언자의 생각이 기억 되는 것을 기다려 여러 번 방문해야하는 수고로 기록을 반복해서 공휴일과 주말을 다 쓰시던 헌신적인 선생의 모습은 책방지기에게 책 한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수고 앞에 책을 항상 귀하게 잡는 예를 심어 주었다.

책 출판 축사로 나온 전 인천시립박물관 조우성 관장의 진심으로 축하하는 기쁜 표정에서 당신이 자가용도 없던, 매우 더운 여름 저녁 연한 하늘색 양복 윗도리가 땀에 절어 소금 꽃이 하얗게 얼룩진 모습으로 들어서서 청계천 책방거리에서 귀한 인천자료를 구했다고 일부러 돌덩이같이 무거운 가방을 열어 보이던 기쁨에 들뜬 표정이 아릿하게 살아났다.

주말과 휴일을 청계천을 돌며 세계 인터넷 시장을 살펴 인천의 본모습을 혼신을 다해 채워가던 팔구십년대 배다리 책방거리에서 본 두 역사가와 오늘의 이희환 박사를 보는 출판 기념회였다.

월미도부터 배다리, 내항에 이르기까지 중심에 나서는 일을 쉬지 않는 와중에 열권에 가까운 인천관련 책을 만들어 내는 저력에 놀라 이희환 박사에게 인천역사에 관심은 어디부터 시작인가 물으니, 극작가 함세덕 선생과 김동석 선생을 연구하면서 자료가 너무 부족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월미도 시민운동에 들어서면서 인천을 넓게 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생전에 이훈익 선생이 인천 역사를 수집하게 된 동기를 부친의 친구이신 어른이 너는 부평사를 한번 만들라고 명령처럼 말씀하셔서 시작하다 보니까 인천까지 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그러면 조우성 관장은 어떤 동기로 인천 역사에 열정을 두게 됐을까? 궁금해서 외람되지만 전화로 여쭈어 봤다.

관장 말씀이 "인하대 박광성 교수님 추천으로 30대 중반에 인천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시사편찬위원으로 있게 됐어요. 문화부장으로 있는데, 지역 역사에 대하여 취재를 나가면 답해주는 이가 없는 거예요. 어느 날 교육감 강연에 취재를 갔는데 몇백명 모인 선생들 앞에서 교육감 말씀이 인천엔 3·1 만세 운동이 없었다는 거예요. 가슴이 먹먹해서 당장 신문사에 들어가서 나 보름동안 없다고 얘기 해놓고 미친 듯이 부산 문서보관소하고 보훈처를 찾아 갔어요, 거기서 찾았어요. 없긴 왜 없어요. 그래서 3·1절 날 신문에 기사로 냈더니, 창영초등학교 총 동창회의 심정구 회장이 전화를 하셨어요. 정말이냐고. 그래서 사실이라고 했더니 다음해 3·1절에 기념비 제막식이 있다고 불러서 창영초등학교에 갔더니 기념비를 세우고 감사패를 주더라고요" 하신다.

의분으로 사실기록을 발굴해낸 열정이 창영초교 총 동문과 배다리와 인천 전체를 흥분으로 들썩이며 역사의 사실을 바르게 자리잡게 했다는 서글프고도 통쾌한 이야기다.
기록에 보면 인천의 3·1만세운동은 창영초교와 인천상업학교가 함께 했다. 기차 통행수가 적은 철로는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

3.1 운동 후 이지만 두 학교의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도 지금 배다리위원회에서 걸어 놓은 '동구의 배다리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 낼 인천의 역사입니다'라는 걸개자리를 넘어 왕래했고 지금도 사람들이 많이 찾고 눈에 잘 띄는 곳이니 3·1만세운동 상징적 표현물을 설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곽현숙 아벨서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