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인천의 외국인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 부평 인천가족공원 내 외국인 특화 묘역 전경.
▲ 미국 상인 타운센트의 묘.
▲ 일제강점기때부터 조성한 북성동 인천외국인묘지 전경.
인천시립박물관이 이번에 발표한 인천외국인묘지에 대한 조사보고서는 1883년 개항 직후부터 인천에 들어온 서양인 피장자 66명 모두 조사를 벌여 이들이 언제 들어왔으며 입국이유와 활동내역 등을 상세하게 밝혔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인천은 개항 이후 새로운 문물과 외국인의 유입 창구였다. 일본과 중국은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배를 타고 인천을 찾았던 사람들 가운데 질병이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먼 이국땅에 묻힌 이들도 있었다.

인천에 들어온 외국인은 일본인이 가장 많고 다음 중국인, 그 다음으로 서양인들이었다. 1910년 조선이 일본 땅이 되면서 일본인은 당시 관점에서 외국인이 아니게 됐고, 중국인도 이방인이지만 화교라는 이름으로 이 땅의 일원이 되었다.

자의는 아니지만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점차 잊혀졌다. 랜디스와 같은 선교사나 상인 타운젠트 등 몇몇 잘 알려진 인물들을 제외하고 인천에 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인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조사를 통해 인천을 찾은 외국인 가운데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인천에 묻힌 서양인들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게 됐다. 서양인 중에는 인천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게다가 외국인묘지에 묻힌 이들은 국적과 성명을 알 수 없는 경우를 포함해 60여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 서양인들의 묘지를 살펴봄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인천의 타자(他者)에 대한 조사·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를 남겼다는 면에서 의미있는 작업이다.

피장자들을 살펴보면 66기의 묘 가운데 국적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경우는 16기다. 나머지 50기 가운데 1기는 합장묘로 이곳에 묻혀 있는 사람은 67명이다. 인적사항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50명 가운데 남성이 41명으로 가장 많았다. 국적은 영국 13명, 미국 12명, 독일 9명으로 가장 많고, 프랑스 3명, 이탈리아 3명, 러시아 2명, 일본 2명이며 이밖에 캐나다 호주, 스페인, 중국인도 1명씩이다. 한국에 온 서양인 중 미국인이 가장 많았으나 이들은 대부분 선교 목적으로 온 사람들로 대부분 합정동 외국인 묘지에 매장되면서 인천에 묻히지 않아 미국인 피장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직업은 개항장이자 항구 도시라는 인천의 특성에 맞게 상인과 해관원이 가장 많고 해군과 상선 선원도 있다. 이밖에 선교사는 영국 랜디스(Eli Barr Landis)와 프랑스 장-바티스트 마라발(Jean-Baptiste Maraval)과 조젭 마라발(Joseph Maraval) 등 3명이며 외교관으로는 서울주재 미국 영사였던 찰스 앨버트 허친슨(Charles Albert Hutchinson)이 유일하다.

외국인 묘지에 처음 매장된 사람은 미국 상인 조지 버트 모트(George Burt Moot)로 1883년 7월 10일에 묻혔다. 가장 최근으로는 미국 군인 브래드포드 여진(Bradford E. Yergin)가 1962년 7월 17일에 안장되었다. 시기별 매장 수는 1900년 이전이 20기로 가장 많고, 1910~1945년 사이가 14기, 1900~1910년이 11기다. 광복이후 매장된 것도 5기다. 1965년 청학동으로 묘지를 이전한 후에 묻힌 사람은 없다. 인천은 개항 이후 러일전쟁 이전까지 많은 외국인이 오갔던 국제도시였지만 일본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식민도시로 도시의 성격이 변화를 반영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조우성 시립박물관장은"이번 조사는 개항기 인천의 모습을 간직한 외국인 묘지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학술 조사로서 의미가 있다. 또한 개별 피장자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통해 기존에 잘못 알려졌던 인물들의 행적을 수정하고, 인천에 설치되었던 외국인, 일본인, 중국인의 묘지 변천 과정을 전반적으로 정리한 점에서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며 "시립박물관은 인천의 근현대 유산에 대한 지속적 조사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인천외국인묘지 변천사
인천 외국인 묘지가 설치된 것은 공식적으로는 1894년부터였지만 실제로는 1883년 개항 직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외인묘지, 각국묘지로도 불리던 외국인묘지는 오늘날 북성동 일대 8000여 평에 묘역이 조성됐다. 피장자 문제를 떠나 풍광이 공원 같았다는 외국인 묘지 자체가 개항 이후 인천에 펼쳐졌던 근대 경관의 일부였다. 이후 외국인 묘지는 몇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1941년 일제가 인천역을 확장하기 위해 외국인 묘지 일부를 수용하면서 묘역 규모가 3000여 평으로 줄어들었다.

1965년에는 도시계획에 따라 청학동 산53-1 일대로 옮겨졌고, 이후 관리의 어려움과 주민 민원 등으로 2017년 부평 인천가족공원 내 외국인 특화 묘역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같이 외국인 묘지는 북성동에서 청학동으로 다시 부평 가족공원으로 옮겨지면서 묘지의 역사적 의미를 잃었고 외국인묘지가 품고 있었던 130여년의 시간을 놓친 셈이라는 지적을 면치 못하게 됐다.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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