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넝쿨장미-30
 (제53회)
 
 여객선은 하루에 한번 들어와서 승객과 짐을 풀어놓고 서둘러 떠나 버렸으므로, 뭍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는 더해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는 외지고 척박한 곳에서 장기간 머물다 보면 조직에 대한 적응력과 함께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모든 인사이동이 인맥과 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특수지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다 보면 상급자들로부터 외면당한다는 정신적인 부담감도 존재했다. 그런데다가 생기는 것도 일체 없었고, 조직에서 도태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섬근무를 기피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나는 경장으로 진급한 마당이어서 특수지 근무를 비켜갈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섬 근무를 자원했던 것이고, 그곳이 바로 서해 5도 중 하나인 ××도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다방 레지로 일하는 소희를 만났던 것이다. 그것도 민정당 면지부지도장과 결혼한다는 소희를. 그때 소희는 삶 자체를 포기한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광주사태 때 생명을 구해준 여고생이 그곳까지 떠밀려와 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슬픈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그녀를 보고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내가 구해준 여고생이라는 것을. 그것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것을 구해낸 사람이라는 것을. 그게 정소희라는 소녀애에 대한 나의 기억이었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소희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그 오월의 아픈 기억을 나의 뇌리 속에서 깡그리 지워 버렸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상처와 고통을 잊는 길이었으니까.
 
“이 애는 위장취업을 할 여자가 아니야. 아니, 그런 걸 할 위인이 못 돼.”
 “그래도 일단 조사는 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
 “그러면 내사라도.” “아니야.”
 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것은 소희에 대한 나의 믿음과 확신 때문이었다. 아니, 소희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씨가 그렇게 판단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소희는 굴곡진 시대의 참혹한 희생자가 아닌가. 나의 결연한 태도에 차지연은 마음을 돌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의혹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것은 차지연의 불신 가득한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럼… 내가 비공식적으로 내사해 볼게요.”
 “좋아, 그러면 계장님은 물론이고 다른 직원들도 모르게 해.”
 “알았어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무슨 부탁요?”
 “이 여자… 그러니까 정소희가 지금 어디서 누구하고 살고 있는지 알아봐 줘.”
 “알았어요.”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내 말에 차지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비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 여자와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군요.”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예요?” “그냥 어떻게 살고 있나 알아보고 싶어서… 꼭 그렇게 해줘.”
 “선배가 어떻게 나오나를 보면서 할게요.”
 “어떻게 나오다니?”
 “그러니까…선배 태도를 보면서 결정하겠다는 거죠.”
 차지연은 이렇게 말하고 생끗 웃었다. 나는 차지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차지연보다 소희의 일이 더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