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몽골을 여행하던 중의 일이다. 국토 대부분이 해발 1600m 이상의 고산지대인 몽골에서는 은하수를 포함한 북반구의 주요 별자리를 선명하게 관측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운이 좋으면 별똥별이 떨어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경우도 있다. 10시간 이상 허허벌판을 오프로드 전용차로 달려 들어간 고비사막의 밤, 필자의 시야에 또렷하게 빛을 내는 별똥별이 포착됐다. 밤하늘을 유유히 가로지르며 꼬리를 태우는 유성의 아름다움에 일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아차 싶어 얼른 두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온 마음을 다해 간절하게 바란 그 소망이 별에게 닿았기를 바라며, 제법 낭만적인 기분이 된 채 숙소로 돌아간 그 날은 어쩐지 정말로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확신까지 들었다.

그 후 시간이 꽤 흘렀다. 그리고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필자가 바랐던 소망은 완전 '망했다'. 성공이냐 실패냐로 따진다면 처참히 실패했고, 정답이냐 오답이냐로 나눈다면 오답을 제출했다. 별님을 향해 빌었던 간절한 소원은, 별이 빛나던 밤하늘마냥 고요하고 순수하던 필자의 마음 안에서 찬란한 빛을 내고는 가볍게 부숴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신년이다 뭐다 새해 소망 하나쯤 빌어보는 우리 어른들,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소원 같은 것 빌어도, 웬만해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 고비사막의 은하수. 사진=김주리 기자

월드 디즈니 100주년…꿈을 찾아 공연을 찾은, 어른이 된 아이들

별님에게 버림받은, 염세적이고 냉소적이며 삐딱한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던 필자가 꿈과 희망의 상징인 월트디즈니컴퍼니의 <디즈니 100주년 기념 콘서트>를 보러 갔다. 부제는 무려 '사운드 오브 매직(마법의 소리 혹은 기적의 소리)'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 인천에서의 공연이었고, 관람객 평가가 상당히 높다는 점이 호기심을 끌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주말인데 만날 사람도 없었고, 딱히 일정이 없기도 했고. 여차저차 공연을 감상하기로 했다.

추위를 뚫고 도착한 아트센터인천에는 예상 외로 필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성인 관람객이 많았다. 사실 우리가 흔히 ‘디즈니 영화’의 국내 전성기로 생각하는 시기는 최근 리메이크된 원작 <인어공주>가 개봉한 8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 최고의 역작이라 여겨지는 <라이온킹>이 등장한 90년대 중반이다. <알라딘> 속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보며 차오르는 감수성에 눈시울을 붉히거나, 마침내 저주가 풀려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미녀와 야수> 속 야수 왕자님과 궁전 가족들을 보며 감격에 겨워하던 그 시절 어린아이들이, 어느덧 어엿한 어른이 돼 이제는 노인이 된 부모님과, 또 일부는 가정을 이뤄 자녀들의 손을 잡고 공연을 찾은 것이다.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등장하고, 디즈니 100년의 역사를 집대성한 공연이 시작됐다.

 

▲ 아트센터인천 <디즈니 100주년 기념 콘서트 - 사운드 오브 매직> 공연. 사진=주최 측

100년의 역사, 추억 속 명장면의 향연

김유현 지휘자를 필두로 과천시립교향악단의 연주가 울려 퍼지며, 스크린을 통해 역대 디즈니 작품의 명장면들이 하나 둘 상영됐다. 일단 공연 형식이 상당히 독특했다. 기본적으로 영상과 함께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이어가는 방식이지만 일정한 순서(이를 테면 개봉년도라던지)를 기준으로 한 편 씩 작품이 소개되는 형식이 아닌, 디즈니 작품 속 피스가 여러 곡 결합돼 편곡된 연주에 따라 어느 때는 흑백의 미키 마우스가 나왔다가, 이내 시간을 건너 뛰어 램프의 요정 지니의 춤으로 연결된다. 이어 타잔이 나무를 타며 자유를 만끽한다. 다음에는 또 정글북의 한 장면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피터팬과 웬디가 행복하게 노래하며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100년간의 수많은 작품들이 오마주로 활용된 하나의 작품으로 새롭게 재탄생한 느낌이다.

화면의 구성과 편집, 오케스트라의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스크린 상영 중간중간 개봉 당시의 화면과 완성되기 전 작화 단계의 밑그림을 함께 보여주며 디즈니의 100년 발자취를 따라갈 때는 아련한 선율로 마음을 간지럽히다, 마법 주전자들이 커피를 따르기 위해 덜컹대며 자리를 이동할 때는 현악기가 화면 프레임을 반 박자 씩 따라가며 미세한 움직임까지 소리로 구현해낸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 모든 꿈 같은 장면들이 때로는 웅장하게, 때로는 신비롭게, 또 때로는 장엄하게 눈과 귀를 사로잡으며 보는 이들의 감정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기술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이 공연은 최고다.

▲ 알렉스 레비(Alex Levy) 디즈니 필름 콘서트 글로벌 테크니컬 다이렉터. 사진=김주리 기자

수많은 명곡과 명장면들, 하나의 공연으로 재탄생하다

명장면들이 펼쳐진 1부, 인터미션, 그리고 또 다른 테마(어떤 테마인지는 기사 말미에 밝히겠다)로 이루어진 2부가 끝난 후, 이번 공연을 총괄한 알렉스 레비(Alex Levy) 디즈니 필름 콘서트 글로벌 테크니컬 다이렉터를 만났다. 알렉스는 1년 전부터 기획된 이번 공연의 영상, 효과, 음악 등을 아우르고 빌드 업 시킨 주요 인물이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스토리텔링’이었다고 한다. 알렉스는 “수많은 디즈니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명장면들 중 적절한 순간들을 고르고, 각각의 영화 속 비슷한 흐름을 연결하고 조율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며 “미키 마우스부터 시작해 모든 캐릭터들을 거쳐 오늘의 디즈니가 완성됐고, 디즈니의 작품을 100년간 접하며 우리가 느끼고 공유했던 감동적인 순간들, 우리를 웃거나 울렸던 순간들을 하나의 스토리로 완성시키고자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작품의 기본 틀이 된 것은 ‘음악’”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각 순간의 테마에 맞는 음악들을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에 맞는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장면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보는 이들의 감정을 고조시킬 수 있는 장면과 음악들을 배합하는 것에 가장 집중했다”고 말했다.

▲ <디즈니 100주년 기념 콘서트 - 사운드 오브 매직> 포스터. 사진=주최 측

사랑과 희망이 사라진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그마치 100년이다. 이토록 긴 시간동안, 영상을 만들고, 음악을 더하고, 메시지를 전해온 디즈니가 지켜 온 가치는 무엇일까. 알렉스는 이에 대해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상상력’”이라고 답한다. 그는 “디즈니는 언제나 꿈과 소망, 상상력이 분출되는 순간을 보는 이의 마음에 심어주려 노력해왔다. 즉, 그러므로, 디즈니의 작품은 아이들만이 아닌 어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소원을 빌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상상력을 동원하는 어른이라니. 지난 100년간 변화를 거듭해온 시대는 분명히 말해 아름답지 않았던 순간들이 더 많았다. 2024년 우리 사회는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냉소적이며, 희망을 품은 채 재차 도전하는 이들을 비웃고 내려다보는 시대가 됐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과 열정은 ‘욕망’과 ‘허영’으로 치부되기도 하고, 포기는 일종의 ‘미덕’으로까지 여겨진다. 모두가 사는 대로 생각하고 있다. 꿈과 희망, 소원과 상상력은 유치한 감성에 불과해졌다.

잠시 숙고하던 알렉스가 답했다. “맞아요. 냉소적인 세상이 됐어요. 그건 분명한 사실이죠” 그러면서 “그럼에도 분명히 세상 어딘가에는 ‘꿈꾸는 자들(Dreamers)’이 존재해요. 그러니까, 이 차가운 세상 어느 한켠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창조하고 공유하려 하는 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들 세대의 방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희망과 사랑을 전하고 격려하는 걸 멈추지 않을 겁니다”

▲ 영화 <위시>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디즈니의 작품은 말이죠”, 알렉스가 말했다. “사랑과 희망, 기쁨만이 아니라 두려움과 분노, 절망, 때로는 상실감까지 표현하곤 합니다. 이 같은 모든 과정이 담긴 여행은 분명 전부 가치가 있는 것들이에요. 모든 이들에게 역경은 언제나 반드시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헤쳐 나가는 순간이 분명히 존재해요. 어떤 식으로든 마주한 역경을 극복하는 것, 그 또한 디즈니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입니다”.

공연 2부의 테마는 ‘시련’이었다. 순수하고 천진한 디즈니의 캐릭터들에게는 언제나 죽음과도 같은 절망이 찾아온다. 그들은 경험한다. 상실과 좌절을, 고통을, 그리고 또 공포를.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다시 나아가고, 소망하고 희망한다. <라이온킹>의 심바가 고향으로 돌아와 스카를 마주하듯, <미녀와 야수> 속 저주에 걸린 성에 갇혀 양초와 탁상시계로 변해버린 이들이 진정한 사랑으로 마법이 풀리는 기약없는 순간을 기다리듯.

지난 3일 디즈니 100주년을 맞아 개봉한 영화 <위시>는 꿈꾸고 희망하는 자들의 소원이 갖는 가치를 담아냈다. “그렇기에, 난 다시 소원을 빌어”라고 말하는 <위시>의 메인 테마곡인 ‘This Wish(소원)’, 그리고 오랜 시간 디즈니의 대표 테마곡으로 사랑받아온 <피노키오> 속 귀뚜라미의 노래 ‘When You Wish Upon A Star(당신이 별을 향해 소원을 빌면)'는 세상을 향한 디즈니의 100년 메시지가 담긴 듯하다.

언제든 고난과 역경은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하고 희망하라. 100년의 시간 동안 디즈니가 건네 온 따뜻한 외침이다.

/김주리 기자 rainbow@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