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례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부묘(祔廟)하고 궁으로 돌아올 때, 가항(街巷)에 결채하고 대궐문 밖 좌우에는 채붕을 설치하고, 기로(耆老)와 유생과 교방(敎坊)이 각각 가요를 올리며, 의금부와 군기시에서 나례를 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나례하는 것이었다.
종묘에 고하고 친히 제사하는 일이 있으면 미리 나례도감(儺禮都監)을 설치하고 헌가(獻架)와 잡상(雜像) 및 침향산(沈香山)을 만들어 민력을 허비하는가 하면, 온 나라의 희자(戲子)가 기일 전부터 모여 연습하고 있다가 환궁할 때에 요란하게 음악을 연주하고 온갖 묘기를 보였던 대내적 나례는 인조 12년인 1634년에 폐지되기에 이른다. 반면에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행했던 대외적 나례는 정조 8년인 1784년에 폐지되었다.
나례에는 수척과 승광대 등이 웃고 희학하는 소학지희도 있었지만, 농령인 방울받기, 근두인 땅재주, 괴뢰인 꼭두각시 놀음 등의 규식지희도 있었는데, 규식지희에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주질 즉 줄타기도 있었다. 영화 '왕의 남자'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줄타기는 조선 시대에도 꽤나 세인들이 좋아하는 유희였는데, 한양의 반석방(盤石坊)의 약산(藥山) 아래에서 살았던 서얼 지식인 서종화(徐宗華, 1700~1748)가 남긴 <약헌유집(藥軒遺集)>에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삼일유가(三日遊街)했을 때 줄타기를 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과거에 급제한 선비에게는 삼일유가(三日遊街)라는 축하연이 있었다. 왕에게서 받은 어사화(御史花)를 꽂은 급제자들이 악사와 광대, 재인을 앞세워 3일간 거리를 행진하며,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 그리고 친척을 방문하며 큰 마을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삼일유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시골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면 문무과의 대소과를 막론하고 집에 도착한 즉시 잔치를 베풀었다. 이것을 도문(到門)이라고 한다. 그리고 선산에 성묘한 것을 소분(掃墳), 친구를 방문하기 위하여 마을 길을 다닌 것을 유가(遊街), 유가할 때 광대들이 피리와 젖대로 앞길을 인도하는 것은 솔창(率傖), 가난한 친구들이 돈을 거두어 노비로 준 것을 과부(科扶), 마을 앞과 선산에 화표(華表) 묘를 장식하기 위하여 묘전에 세워 둔 것을 효죽(孝竹)이라고 한다. 이 효죽은 호남과 영남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서북지방에서는 사용한 사람이 없었고, 서울에서는 유가가 3일에 불과하였다.”
조선에서는 문과(文科)·무과(武科)·중시(重試)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한 이에게 나라에서 각각 대형 일산(日傘)인 개(蓋) 2, 안장 갖춘 말[鞍具馬] 1필(匹)을 내려 주고, 아울러 우인(優人)을 주어 유가(遊街)하게 하였으나, 장원에 들지 못한 합격자는 삼일유가에 드는 비용을 모두 스스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이에 따른 폐단도 많았다.
서종화가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인 사마시(司馬試)에 처음으로 차례에 오른 것은 영조 3년인 1729년이었다. 이때 삼일 동안 유가할 때 전라도 무안 출신의 줄타기 명인 박만회(朴萬會)를 초청하여 축하잔치를 벌였다. “우인(優人) 박만회(朴萬會)는 무안 주산(舟山) 사람이다. 내가 사마시(司馬試)에 처음으로 차례에 올랐을 때 거느렸던 사람이다. 창우(倡優) 잡기에 대해 못하는 것이 없지마는 특히 줄타기(乘索之戱)를 잘하였다. 뜰의 좌우에 몇 길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나무 끝에 줄 하나를 가로로 걸친다. 그러고서 펄쩍 뛰어 줄에 올라타는데, 앉기도 하고 무릎을 꿇기도 하며, 눕기도 일어나기도 한다. 다리를 꼬고 걸터앉기도 하고, 한 발로 서기도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춤을 추기도, 휘파람을 불기도, 젓대를 불기도 한다. 옷을 벗어 다시 입기도 하고, 망건을 벗어 다시 쓰기도 한다. 활보하기도 하고 급히 뛰어가기도 하며, 몸을 돌려 동쪽으로 가기도 하고, 동쪽으로 가다가 몸을 돌려 서쪽으로 가기도 한다. 곤두박질(筋斗)했다가 뛰어오르기도 하고, 줄을 안고 돌기도 한다. 거미처럼 휘늘어지고 학처럼 다리 들고, 호미로 김매고 풀무질하며, 얼음지치고 널뛰기하는 기술이 하나에 만족하지 않는다. 구경꾼들이 에워싸서, 머리끝이 솟구치고 혀를 내밀며, 기이하다고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참으로 빼어난 기예라고 할 만하다.”
<약헌유집(藥軒遺集)>에서는 박만회가 줄을 탈 때의 갖가지 동작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앉기도 하고 무릎을 꿇기도 하며, 눕기도 일어나기도 하며, 다리를 꼬고 걸터앉기도 하고, 한 발로 서기도 하며, 활보하기도 하고 급히 뛰어가기도 하며, 몸을 돌려 동쪽으로 가기도 하고, 동쪽으로 가다가 몸을 돌려 서쪽으로 가기도 하는 동작은 마치 어제 본 줄타기의 장면과도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줄은 탈 때 연주되었던 갖가지 장단이 이미 영조 3년인 1729년에도 있었다는 얘기다. 주질(注叱)은 문종 즉위년인 1450년의 기록에서도 보인다. 또한 고려 말 이색이 지은 <목은집>의 '구나행(驅儺行)'이라는 시에서도 줄타기를 묘사하고 있는데, 현행 풍물의 장단 중에는 고려 때부터 연주되던 장단이 끊이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성섭 풍물미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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