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나례(儺禮)는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거행되기도 하였고, 궁중에서 유흥을 즐기기 위해서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크게 두 가지 형식이 있었다. 하나는 규식지희(規式之戲)이고, 다른 하나는 소학지희(笑謔之戲)이다.
소학지희(笑謔之戲)에는 수척(水尺)과 승광대(僧廣大) 등이 웃고 희학하는 놀이였다. 규식지희(規式之戲)에는 광대(廣大)와 서인(西人)의 주질(注叱)·농령(弄鈴)·근두(斤頭) 등과 같은 유희가 있었는데, 주질은 줄타기이고, 농령은 방울받기이고, 근두는 땅재주를 말한다.
수척과 승광대가 펼쳤던 소학지희에는 음담패설 등의 희학도 있었던 것 같다. 세종 11년인 1429년 10월 28일 세자가 나희를 보자 신하들이 관람하지 말 것을 건의한 적이 있었다. “전하께서 나희를 관람하시는 것도 오히려 불가하옵거든 하물며 세자께서는 그 연령이 바야흐로 어리시고 덕을 잡으심이 아직 굳지 못하시니, 마땅히 요사한 것을 멀리하고 미리 덕성을 기르셔야 할 터인데, 이제 나희를 보심으로 인하여 마음을 잃고 학업을 폐한다는 것은,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소학지희에는 또한 평소 조정에서 볼 수 없었던 신랄한 풍자도 자행되었던 것 같다. 일종의 예외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예외적 상황 속에서 수척과 승광대는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세조 14년인 1468년 우인(優人) 수십 명이 나례(儺禮)로 인하여 모두 당상관의 복장을 갖추고 전정(殿庭)에 들어와서 서로 희롱한 적이 있었다. “영공(令公)은 어느 때에 당상관이 되었기에 복장이 이러한가? 내가 경진년(1460년, 세조 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신사년(1461년, 세조 7년) 겨울에 양전 경차관(量田敬差官)이 되고, 정해년(1467년, 세조 13년)에 이시애(李施愛)를 잡아서 드디어 여기에 이르렀다.”
하니, 듣는 자가 모두 조소하였다.
영공(令公)은 정삼품과 정이품의 관원을 일컬으며, 일명 영감이라고도 한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고속 승진한 자의 당상관 복장을 빗대어, 그 당시의 상황을 풍자한 것이다. 함길도(함경도)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서, 조선 왕실의 발상지였다. 조선은 개국 이후 함길도를 효율적으로 통치, 방어하고 왕실의 발상지를 우대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본토 출신 호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하지만 세조가 등극한 후 중앙집권정책을 강화하여 북쪽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중앙에서 남쪽 출신의 수령을 파견하자, 함길도의 호족들은 이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더욱이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축성 등의 사업으로 백성들을 괴롭히자 함길도의 민심은 크게 반발하였다('우리 역사넷' 참고). 이에 1467년(세조 13년) 세조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반발해 이시애(李施愛)가 함길도민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나례의 소학지희에 참여하였던 연희자들의 지적 수준은 매우 높았던 것 같다. 연산 5년인 1499년 12월 30일의 기록을 보면, 나례가 거행될 때, 우인(優人) 공결(孔潔)이란 자가, 이신(李紳)의 민농시(憫農詩)를 외워 낭송하였으며,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 등의 말을 논하였다고 한다. 이에 승전색(承傳色)의 관리가 '네가 문자를 아느냐. 글은 몇 책이나 읽었으냐?' 하고 물으니, 공결이 '글은 알지 못하고, 전해 들은 것뿐입니다.' 하고 서서 대답하자, 물러가 놀이를 하라 하여도 따르지 않았으니 자못 무례하다 하여, 의금부에 내려서 “형장 60을 때려 역졸(驛卒)에 소속시키라.” 하였지만, 승지 등이 아뢰기를, “공결은 우인으로서 놀이하는 것을 알 뿐입니다. 어찌 예절로 책망하오리까.”하였다.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은 <대학(大學)>에 나온다.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과 친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善)에 머무는 데 있다.”는 것이 이른바 삼강령이고,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팔조목이다. 천인(賤人)인 우인(優人) 공결(孔潔)이 대학을 운운하자 괘씸하게 여긴 것이다.
이신(李紳)은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이백, 두보만큼 유명한 시인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시 민농(憫農)은 당시 농민의 어려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한데, 우인(優人) 공결(孔潔)이 이를 낭송하여 시대를 풍자한 것이다.
김 매는 날 한낮이면 鋤禾日當午
땀 방울 벼 포기 적셔 땅에 떨어지네 汗滴禾下土
누가 알겠는가 밥상 중의 밥이 誰知盤中飱
알알이 모두 (농부의) 피땀인 것을 粒粒皆辛苦
이에 그치지 않고 배우 공길(孔吉)이란 자는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전하는 요(堯)·순(舜) 같은 임금이요, 나는 고요(皐陶) 같은 신하입니다. 요·순은 어느 때나 있는 것이 아니나 고요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하고, 또 《논어(論語)》를 외어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한 데 가깝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流配)하였다고 한다(연산 11년 12월 29일).
/송성섭 풍물미학연구소 소장·사진제공=한국음악학자료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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