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뢰부(傀儡賦)'를 노래한 나식(羅植, 1498∼1546)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는 그의 사상을 '괴뢰부(傀儡賦)'를 통해 살필 수 있는데, 그는 꼭두각시 놀음이 고금의 특이한 예술이라고 소개하면서, 이를 통해 세상 사람들의 허황되고 망령됨을 희롱하였고, 세상 사람들이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세태를 탄식하였다.
그는 천지는 세대를 번갈아 교대하는 여관(天地之逆旅)이라고 생각하였다. 헌원이 탁록에서 전쟁을 시작하고 사해 안에 수레와 문자를 보급한 이후 제순(帝舜)과 하나라의 우 임금과 탕 임금, 주나라의 무왕, 춘추시대, 전국시대, 진나라, 한나라, 당 태종, 송나라 태조에 이르기까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오래도록 지속한 이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레는 하늘의 끝에서 소리를 거두고, 새는 구름처럼 날아가 자취가 없듯이, 성인과 보통 사람이 뒤섞여 같은 곳으로 돌아가, 헛되이 연이어진 하나의 무덤일 뿐, 당시의 번화함을 생각하더라도, 누구라도 이 꼭두각시 놀음과 차이가 없다.”고 그는 노래하였다.
인간 세상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천지 또한 이에 비견될 수 있다고 한다. 하늘이 자(子)에서 열리고 땅이 축(丑)에서 열린 후, 위 아래가 바로 잡히고 높은 곳이 두텁고, 좌우는 오행으로 지원하고, 앞뒤는 귀신으로 떠들썩하게 하고, 산천을 늘어놓아 장식하고, 해와 달을 매달아서 무늬하고, 바람과 우레를 사시에 내보내어서, 만물을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이 서로 합하여 어우러진 곳에 고동치게 하였는데, 차고 비는 이치에도 도수가 있어, 오직 '혼돈(混沌)'만이 옆에 서서 이것과 저것으로 서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식은 왜 혼돈(混沌)을 끌어들여 얘기하고 있을까? 왜 혼돈만이 차고 비는 하늘의 도수를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가? 혼돈은 <장자>에서 언급하고 있는 혼돈이 아닌가? <장자>에서는 혼돈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남해의 황제는 숙(儵)이고, 북해의 황제는 홀(忽)이며, 중앙의 황제는 혼돈(渾沌)이다. 숙과 홀이 때마침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매우 선(善)하게 그들을 대접했으므로,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에 보답할 것을 의논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눈·귀·코·입의) 일곱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이것이 유독 혼돈에게만 없다. 시험삼아 구멍을 뚫어 주자.' (그래서)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장자·응제왕>
혼돈은 왜 눈·귀·코·입의 일곱 구멍을 뚫어주자 죽고 말았던 것일까? 장자는 인간의 감각기관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각 능력으로도 사물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제시한 것이 '심재(心齋)'이다. “너는 의지를 한결같이 하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듣는 것은 귀에서 그치고, 마음은 부절에서 그친다. 기라는 것은 허(虛)하여 만물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직 도(道)만이 허(虛)에 모인다. 허(虛)가 심재이다.”<장자·인간세>
기(氣)로 듣는다는 것은 질 들뢰즈(1925~1995)가 말하는 감성의 수동적 종합을 넘어선 통찰이고, 양자역학의 설립에 기여하여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닐스 보어의 이론에 의거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발언이다. 기로 듣는다는 것은 현대물리학과 일맥상통하는 통찰이다.
나식(羅植)은 또한 '괴뢰부(傀儡賦)'에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없고(無眞僞之可別), 크고 작음을 바르게 할 수 없으며(豈小大之能端), 같음은 다름에서 생겨나고(同生於異), 진실은 거짓에 뿌리하네(眞本於假), 천지가 한 손가락이고(天地一指), 만물은 한 마리 말이네(萬物一馬), 어지럽게 섞인 것이 도이고(繽紛者道), 가지런하지 않은 것이 참이네(不齊者眞), 크고 작음은 한 몸이요(大小一體), 득실은 같은 수레바퀴이며(得失同輪), 꼭두각시가 사람 세상이요(傀儡人世), 사람 세상이 꼭두각시이고(人世傀儡), 천하를 돌아보건대(顧瞻天下), 모두가 비단의 채붕(무대)로다(皆是繪綵)”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는 모두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과 관련되어 있는 발언이다.
“천지가 하나의 손가락이고(天地一指也), 만물도 하나의 말이다(萬物一馬也).”라는 표현은 <장자·제물론>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손가락(指)으로 '손가락의 손가락이 아님(指之非指)'을 비유하는 것은 '손가락이 아님(非指)'을 가지고 손가락의 손가락이 아님(指之非指)을 비유하는 것만 못하다. 말(馬)을 가지고 '말의 말이 아님(馬之非馬)'을 비유하는 것은 말이 아님(非馬)으로 말의 말이 아님(馬之非馬)을 비유하는 것만 못하다.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도 하나의 말이다.”
장자의 이러한 발언은 개념적 차이와 차이 자체의 구별에 관한 것이다. 조랑말, 얼룩말, 수레를 끄는 말, 천리마 등은 개념적으로 하나의 말(馬)이다. 마찬가지로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 등은 모두 개념적으로 하나의 손가락(指)이다. 그러나 차이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차이 자체이며, 개념적인 차이가 아닌 손가락(非指), 개념적인 차이가 아닌 말(非馬)이라는 것이다. 개념적 차이는 차이 자체를 제거한 이후에 얻은 부대 현상일 뿐이라는 것인데, 이로부터 보면 나식은 노장 사상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송성섭 풍물미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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