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좌우로 갈려 총부리 겨눴던 역사 되풀이 말아야

한강하구 위치한 교동도, 북녘 지척
피난 왔다 못 돌아간 실향민 3만여명
특공대, 부역 혐의 주민 200여명 학살

폐교 활용 인천난정평화교육원 개원
인천시, 남북 경색 속 평화 정책 지속
▲ 인천 강화평화전망대 망배단에서 한강하구를 사이에 두고 건너다보이는 북녘땅.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 인천 강화평화전망대 망배단에서 한강하구를 사이에 두고 건너다보이는 북녘땅.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한강하구를 따라 흐르는 물길 위로 교동대교가 바라보이는 인천 교동도 월선포 선착장에서 10여분을 걸으면 야트막한 산이 나타난다. '안개산'으로 불리는 산자락 오솔길에선 팻말 하나를 마주할 수 있다. 창고와 농기계들로 둘러싸여 출입이 차단된 것처럼 보이는 팻말에는 '강화군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 희생지'라고 적혔다. 1951년 1월 중순 부역 혐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들이 희생된 곳이다.

안개산에서 직선거리로 2㎞ 정도 떨어진 교동면 고구리 해안에는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시설인 '유격군 충혼 전적비'가 놓여 있다. 비정규군이었던 유격대를 기리는 전적비 옆으로는 '멸공'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호랑이 조각상이 북녘땅을 향해 있다. 1951년 '1·4 후퇴' 무렵 군번도 계급도 없이 모인 이들은 '반공결사대'로 총을 쥐었다. 전쟁 한복판에 놓인 교동도에선 군복을 입지 않은 민간인들마저도 대립 국면에 휩쓸려갔다.

▲ 인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에 설치된 유격군 충혼 전적비./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 인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에 설치된 유격군 충혼 전적비./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민간인들마저 휩쓸린 대립 국면

'평화의 섬'으로 일컬어지는 교동도는 행정구역상 인천 강화군 교동면이다. 섬 전체가 민간인 출입 통제선이자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만나 황해로 흐르는 한강하구에 위치한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까지만 해도 교동도에서 건너다보이는 북녘땅은 황해도가 아닌 '경기도 연백군'이었다. 썰물 때면 갯벌이 펼쳐지는 교동도와 연백군 앞바다는 걸어서 오갈 수 있었다고 한다. 연백과 가장 가까운 거리는 2.5㎞에 불과하다.

교동면 인구는 지난달 기준 2769명인데, 전쟁이 벌어졌던 1951년에는 2만9764명이나 됐다. 당시 기록을 보면 원주민은 1만505명, 피난민 수는 1만9259명이었다. 인천연구원은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피난 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이 3만여명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같은 생활권이었던 교동과 연백의 운명은 엇갈렸다. 전쟁과 수복, 후퇴를 거듭하며 남북을 갈라놓은 선은 교동도를 오르내렸다. 전란 속에 민간인 출신들로 유격대가 꾸려졌고, 민간인들에게 학살이 가해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009년 교동도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한 결과, 희생자 수가 적게는 183명에서 많게는 223명이라고 밝혔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183명 가운데 아동·노인·여성은 136명(74.3%)에 이른다. 특히 5세 이하 15명을 포함해 15세 이하 아동이 61명으로 33.3%를 차지한다.

▲ 인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안개산에 있는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 희생지 안내판./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 인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안개산에 있는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 희생지 안내판./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

1951년 1월 중순 교동면 상용리 안개산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당시 1·4후퇴로 군경이 모두 남쪽으로 떠난 교동도에는 민간인들만 남아 있었다. 향토 방위를 명분으로 조직된 특공대는 주민 수십 명을 부역 혐의자로 몰아 연행했고, 총부리를 겨눴다. 상용리 일대에서 민간인 희생자로 확인된 주민은 최소 31명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강화(교동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를 통해 “교동도 민간인 희생자들은 남편 또는 아들이 북한 점령 시 부역을 하다가 피신 월북했다는 혐의를 가진 자들의 가족”이라며 “아동·노인·여성을 대상으로 한 무자비한 행위는 교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군사 작전상의 피해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정전으로 접경지역이 된 교동도에는 전쟁 유족과 실향민, 참전 용사들이 눌러앉았다. 가해와 피해 역사가 공존한 교동도에서 전쟁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전란의 한복판에 있던 섬은 이제 평화의 섬으로 불리고 있다. 폐교를 활용해 올 7월 교동도에서 개원한 인천난정평화교육원 전시관에는 '모두의 평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홍용표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인천에서 열린 '황해평화포럼'에서 “교동도·백령도·연평도는 안보와 평화가 직결되는 현장이다. 서해를 평화수역으로 바꾸는 과정은 작은 '평화들'의 연결을 통해 한반도 전체의 큰 평화를 견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향후 남북 교류협력사업에서 중앙정부보다 상대적으로 자율적 공간이 넓고, 민간단체에 비해 인력과 예산이 풍부한 지방정부의 연계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천형 평화 정책, '세계평화도시'

지방정부 차원에서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 정착을 향해 나아가려는 시도는 지난 2021년 수립된 '인천시 평화도시 조성 기본계획'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세계와 한반도를 잇는 평화도시, 인천'을 비전으로 하는 기본계획은 인천형 남북 교류와 접경지역 협력, 평화 의제의 국제적 확산 등을 실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교류 사업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평화 정책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가 인천연구원과 해마다 공동 주최하는 '황해평화포럼', 인천시교육청과 협업해서 평화 체험·교육 공간으로 문을 연 난정평화교육원도 평화도시 조성 움직임에서 비롯했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지난달 15일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에서 “선열들의 헌신과 희생은 한 시대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평화와 안보를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며 “인천을 세계 평화의 도시로 선언한다”고 밝혔다.

/특별취재팀

 


 

[인천연 '2022 평화·통일 인식 조사'] '인천시 역할론' 폭넓은 공감대…남북통일 필요' 응답은 하락세

 

한반도 평화에 인천시 역할 중요 71.6%

통일 필요 55.5%…2년 새 14.4%p 줄어

'평화도시' 인천에서 평화를 바라는 인천시민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10명 가운데 7명은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인천시 역할에 공감했고, 절반이 넘는 시민은 '통일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15일 인천연구원의 '2022 인천시 평화·통일 인식 조사' 보고서를 보면, 한반도 평화와 남북 관계 개선에 인천시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시민 1500명 가운데 71.6%가 '공감한다'고 답했다.

남북 관계 개선 노력에 공감한다는 의견은 2020년 69.9%, 2021년 64.3%에서 증가 추세를 보였다. '공감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28.4%였다. 인천시가 우선순위로 추진해야 할 교류 사업으로는 '남북 사회문화 교류 활성화'(30.7%), '남북 경제협력 활성화'(30.0%)가 꼽혔다.

지난해 10월 인천 거주 18세 이상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조사에서 남북통일의 필요성에 대해선 절반이 넘는 55.5%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공존 상태를 유지하는 편이 낫다'는 28.9%, '불필요하다'는 15.6%로 나타났다. 다만 2019년 69.9%에 달했던 '통일 필요' 응답률은 2020년 61.5%, 2021년 62.3%에 이어 큰 폭으로 떨어졌다.

통일에 대한 어두운 전망은 경색된 남북 관계 영향으로 풀이된다. 북한에 대한 인식 질문에서 '경계의 대상'이 45.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협력의 대상'은 29.6%에 그쳤다. 2020년까지만 해도 '협력의 대상' 응답률이 38.4%로, '경계의 대상'(35.1%)을 웃돌았는데 이런 인식이 뒤바뀐 것이다.

남북 관계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남북 관계가 '개선됐다'고 응답한 비율은 8.6%에 머물렀다. 1년 전 조사였던 2021년 32.9%에서 크게 떨어진 수치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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