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허 찌른 역사적 작전…승전의 불 밝히다

조수간만의 차 크고 장애물 악조건
맥아더, 방어망 파괴 후 군대 상륙
북한군 후방 차단·지상 반격 작전
격렬한 전장…전쟁 결정적 전환점

9월15일 자정 직후 팔미도 등대 점등
▲ 월미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천 앞바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진 현장이다.
▲ 월미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천 앞바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진 현장이다.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월미공원 전망대로 오르는 길목에는 네 갈래 줄기로 뻗은 벚나무가 있다. 원래 가지들은 잘려 나갔지만 새롭게 돋은 줄기는 250㎝ 둘레 밑동에서 이전보다 더욱 굵어졌다. 70여년 세월 동안 15m 높이로 자라난 벚나무는 '다시 일어선 나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다시 일어선 벚나무는 포격에도 살아남은 '월미 평화의 나무' 가운데 하나다. 지난 25일 월미산에서 만난 월미공원사업소 관계자는 “인천상륙작전 이전부터 월미산에서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80여그루를 2015년 전수조사해서 평화의 나무를 선정했다”며 “전쟁 당시 민둥산이 됐지만 평화의 나무들은 상처가 아문 뒤에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 중구 북성동1가 인천내항 제8부두 옆에 있는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레드비치)' 표지석.
▲ 중구 북성동1가 인천내항 제8부두 옆에 있는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레드비치)' 표지석.

▲포탄 쏟아진 월미산, 불 켜진 등대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며칠 전부터 '다시 일어선 나무'는 포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해발 105m 월미산을 품은 월미도는 작은 섬이었지만 제방으로 내륙과 연결된 인천 앞바다 요충지였다.

1950년 9월10일부터 관문이나 다름없는 월미도에 유엔군 폭격기들의 포탄이 떨어졌고, 사흘 뒤부터 함포 사격이 시작됐다. 밀물과 썰물의 차가 평균 7m, 최대 10m에 달한 인천 앞바다에서 상륙전이 가능한 날짜는 9월15일이었고, 만조는 3시간여에 불과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책 '한국전쟁'(2005)에서 “애초에 미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비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크고, 인천 앞바다에 있는 월미도를 비롯한 섬들이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며 “유엔군은 먼저 함포 사격으로 상륙할 지역의 방어망을 파괴한 다음, 군대를 상륙시켰다”고 했다.

그날 오전 6시33분 월미도 해안가에 한미 해병대가 당도했다. 월미도 선착장 옆에 세워진 '녹색해안(그린비치) 상륙 지점' 표지석은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3곳의 상륙 지점 중 한 지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초 상륙 후보지로 떠오른 곳은 인천과 군산, 주문진 등지였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공방을 거듭하던 연합군은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북한군 후방을 차단해 지상에서 반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뒷날 인천상륙작전으로 성공한 계획이다.

전초전은 상륙 한 달여 전부터 시작됐다. 해군은 그해 8월18일 옹진군 덕적도, 이틀 뒤 영흥도 상륙전에 나섰다. 그리고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 앞바다 동향을 수집했다. 첩보전 끝에 9월15일 자정 직후 팔미도 등대에 불이 켜졌다.

▲ 미추홀구 용현동 토지금고시장과 용정근린공원 사잇길에 세워진 '인천상륙작전 청색해안(블루비치)' 표지석.
▲ 미추홀구 용현동 토지금고시장과 용정근린공원 사잇길에 세워진 '인천상륙작전 청색해안(블루비치)' 표지석.

▲그린·블루·레드…세 갈래 상륙전

미추홀구 용현동 토지금고시장과 용정근린공원 사잇길에는 인천상륙작전 30주년을 기념해 학익동에 세워졌다가 본래 상륙 지점으로 옮겨진 '청색해안(블루비치)' 표지석이 남아 있다. 표지석에는 “상륙작전 당시 현재 위치로부터 낙섬까지는 염전의 제방으로 연결돼 있었고, 연합군은 이 제방과 인근 해안 일원을 청색해안으로 명명해 상륙을 시도했던 것”이라고 적혔다.

인천상륙작전은 세 갈래로 진행됐다. 만조를 기다린 연합군은 2단계 작전을 구상했다. 9월15일 새벽 밀물 때는 월미도에 상륙하고, 12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만조를 기해 인천 내륙으로 향한다는 계획이었다. 월미도에서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그날 오후 5시32분 연합군은 청색해안에 닿았다.

그와 비슷한 시각 '적색해안(레드비치)'으로 이름 붙은 곳에서도 동시에 상륙전이 벌어졌다. 인천역에서 월미도로 향하는 길목에는 적색해안 표지석이 인천내항 제8부두를 바라보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2009)에서 “적색해안에선 돌격 상륙부대가 높은 안벽을 기어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했다”며 “오후 8시경 적의 저항을 받아 부상자를 낸 끝에 (인천)기상대 고지를 점령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 중구 북성동1가 적색해안 표지석 옆에 자리한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
▲ 중구 북성동1가 적색해안 표지석 옆에 자리한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

▲'백두산함' 출격한 두 번째 작전

상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었지만 '1·4 후퇴'로 연합군은 다시 서울 이남까지 밀려났다.

그로부터 한 달여 만인 1951년 2월10일부터 이틀간 제2차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졌다. 해군과 해병대가 함정 6척을 동원해 인천항을 되찾은 당시 전투에는 해군 최초 전투함이었던 '백두산함(PC-701)'도 출격했다.

중구 북성동1가 적색해안 표지석 옆에 자리한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에는 백두산함 사진이 새겨져 있다.

인천시사편찬위원회는 지난해 발간한 '인천전쟁사'에서 “인천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로 한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여러 전쟁에서 주요 진입로가 되기도 하고, 격렬한 전장이 됐으며,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며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개전 이후 수세 일변도의 방어 작전에서 벗어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정전 70주년을 맞아 내달 14일부터 19일까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던 인천상륙작전 기념 주간 행사도 열린다. 인천시 관계자는 “한국전쟁의 전황을 뒤바꿨던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인천을 한반도 평화와 안보를 위한 국제적 결집의 장으로 확대해 나가는 초석으로 삼고자 한다”며 “인천상륙작전 기념사업을 확대하고 75주년이 되는 2025년에는 참전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국제 행사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격으로 고사했다가 새로 줄기가 돋은 월미산 벚나무로 '다시 일어선 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월미 평화의 나무' 가운데 하나다.
▲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격으로 고사했다가 새로 줄기가 돋은 월미산 벚나무로 '다시 일어선 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월미 평화의 나무' 가운데 하나다.

 


 

원주민 귀향 문제 해결·상처 치유해야

▲ 지난 25일 인천 중구 북성동1가 스페이스 더꿈에서 열린 '기록으로 보는 월미도 귀향이야기' 전시회에서 만난 한인덕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장.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 지난 25일 인천 중구 북성동1가 스페이스 더꿈에서 열린 '기록으로 보는 월미도 귀향이야기' 전시회에서 만난 한인덕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장.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월미도 거주 민간인들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9월10일 마을에 가해진 미군 폭격으로 집단 희생됐다. 이 집중 폭격으로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조사보고서에서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월미도는 군사기지가 됐고, 그에 따라 유족과 거주민은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해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월미도는 '불바다'나 다름없었다. 항공기와 항공모함에서 쏟아진 포탄들로 마을은 폐허가 됐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에 의하면 당시 폭격으로 민간인 100여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지금의 월미공원 자리에 있던 마을은 미군 부대로 쓰였다. 반년여가 지난 1951년 2월12일 원주민들이 모여 대책회를 구성하면서 귀향을 위한 기나긴 여정이 시작됐다. 전쟁 이전 월미도에는 120가구, 600여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귀향길은 과거에도, 지금도 가시밭길이나 마찬가지다. 1971년 미군이 철수한 뒤에는 해군이 들어왔다. 2001년 해군 부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월미공원은 시민에게 개방됐는데, 원주민 귀향은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무산됐다. 2019년 '과거사 피해주민 귀향 지원을 위한 생활안정 지원 조례'가 제정되면서 인천시가 월미도 실향민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길이 열린 게 그나마 진전이었다.

지난 25일 '기록으로 보는 월미도 귀향이야기' 전시회에서 만난 한인덕(78)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은 “70년이 넘도록 생명과 재산을 잃어버린 원주민들은 눈앞에 놓인 고향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올해에도 희생자 위령제를 연다. 원주민 귀향 문제를 해결하고 상처를 치유해야 인천상륙작전도 제대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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