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물줄기 바꾼 참전용사…“영원히 기억되길”

[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 부태삼씨]

당시 17세 어린 나이 '참혹한 경험'
'조국 수호 당연한 일' 생각으로 맞서
눈앞엔 시체들뿐…죽기 살기로 임해

전쟁 겪은 세대 점점 사라져 안타까움
“얼마나 참담한지 잊어버리면 안 돼”
▲ 해병대 4기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부태삼(90)씨가 지난달 31일 인천역 인근 적색해안 표지석 앞에서 당시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렛츠 고 투 인천(Let's go to Incheon).”

1950년 9월12일 부산항을 출발한 미군 수송함 어딘가에서 구호가 터져 나왔다. 국군 해병대 군복을 입고 있던 부태삼(90)씨 귀에도 '인천'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졌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사흘 뒤 부씨가 탄 함정은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다. “온통 새까맣게 보였어요. 검은 배들이 바다를 뒤덮으면서 한꺼번에 인천으로 향했으니까. '하선망'이라고 있어요. 밧줄로 만든 그물인데, 그걸 잡고 상륙 주정으로 옮겨 탔지.”

9월15일 오후 5시가 넘어 그는 바닷가 안벽을 기어올라갔다. “미 해병대는 사다리를 준비해왔는데,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맨손으로 무작정 올라간 거지.” 부씨가 상륙한 지점은 '적색해안(Red Beach)'이라고 불린, 인천역 인근 대한제분 일대 해안이었다.

 

▲“눈앞에 죽음이”…73년 전 적색해안

지난달 31일 오후 인천 중구 북성포구 앞에서 만난 부씨가 적색해안 표지석 앞에 섰다. 표지석을 바라보던 그가 'The Red Beach Point of Incheon Landing Operation(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상륙지점)'이라는 문구를 영어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73년 전 해병대로 참전한 인천상륙작전에서 긴 항해 끝에 밟은 땅이었다.

“영어를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전쟁 당시 사용했던 영어 단어나 문장들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오랜만에 이곳을 다시 찾아오니까 감회가 새롭네.”

전쟁이 일어났던 그해 부씨는 부산공업중학교 3학년이었다. 부모님이 계시던 제주도에서 사촌동생들과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며 해병대 4기가 됐다. 1950년 8월30일, 인천상륙작전을 보름여 앞둔 때였다. '조국을 지키는 일은 당연한 의무'라는 생각뿐이었다. 제주항에서 수송선에 몸을 실은 그는 부산을 거쳐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월미도에는 그날 새벽에 미 해병대가 들어갔고, 우리는 다음 만조를 기다려서 적색해안으로 간 거예요. 연기가 자욱했으니까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생각으로 총을 쏘며 달려갔지.”

그의 기억대로 적색해안 상륙 부대는 지금의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봉우리를 점령하기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인천시사편찬위원회가 지난해 발간한 '인천전쟁사'는 “상륙한 해병들은 안벽 너머로 수류탄을 던지는 한편, 재빨리 사다리를 걸치고 기어올라 신속하게 내륙으로 전진했다. 왼쪽으로 진입한 소대는 참호에서 날아오는 자동화기와 소화기 사격을 심하게 받았다”고 기록했다.

부씨에게도 전쟁은 참혹하게 다가왔다. “그날 밤 전투 끝에 지쳐서 '차이니즈 세메터리(중국인 묘지)'에서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주변에 시체들이 있더라고. 눈앞에는 죽음이 있었고, 그저 살려고 애썼던 거지.” 당시 중국인 묘지는 도화동에 있었다. 그가 인천상륙작전을 마치고 밤을 보낸 곳은 중구 개항동(북성동·송월동) 일대에 남아 있던 외국인 묘지로 추정된다.

 

▲“참혹했던 전쟁, 오래 기억해주길”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을 위한 시가지 전투 이후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부씨는 정전 협정이 체결되고도 한참이 흐른 1973년에야 군복을 벗었다. 고향인 제주도에서 해병대로 자원 입대한 지 23년 만이었다.

“강화도 해안 부대에서 부사관으로 군 복무를 계속했어요. 상사 계급으로 제대했는데 인천에 계속 눌러앉았지.”

군 생활을 마친 뒤에도 그는 전쟁의 기억을 놓지 않았다. 연고가 없었던 인천 미추홀구에서 가족들과 살면서 참전용사들과 인연을 이어갔다. '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회' 회장도 맡았다.

“전쟁을 겪은 세대가 사라지고 있잖아요. 참전용사들도 얼마 남지 않았고. 회장직을 넘기려고 해도 다들 건강이 좋지 않고 고령이니까 그대로 안고 가는 거지. 해병대전우회도 그렇고 참전용사 단체에 대한 지원도 열악한 상황이에요.”

정전 협정 70주년,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73주년을 맞은 올해에도 부씨는 그날을 떠올리고 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순간에 있었던 참전용사는 '기억'의 중요성을 되새긴다.

“전후 세대는 먹고사느라 바빠서 지금을 있게 한 전쟁 역사는 잘 모르는 거 같아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때 열악했던 환경을 극복하고 전쟁을 치러낸 사람들을 오래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전쟁, 잊을 수 없는 순간 … 평범한 사람들 삶까지 뒤흔들어”

 

이헌실씨 “처마에 숨어 있던 생각 나”

임계성씨 “집에 포탄 떨어져 터 잃어”

김태호씨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 많아”

강분희씨 “부상자 간호해도 다 죽어”

▲ 인천상륙작전 직후 인천역 뒤쪽 대한제분에서 해안동으로 이어지던 도로를 걷는 사람들 모습.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소장 자료. /사진제공=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 인천상륙작전 직후 인천역 뒤쪽 대한제분에서 해안동으로 이어지던 도로를 걷는 사람들 모습.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소장 자료. /사진제공=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광목 찢어지는 소리가 나요. 한참 째애액 소리가 난 다음에는 쾅쾅 부스러지는 소리가 나. 함포 사격도 며칠 동안 했어요.”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1947년 무렵 인천에 정착한 이헌실(1937년생)씨는 중구 관동 집에서 전쟁을 맞았다. “비행기 소리만 나면 애관극장 처마에 숨어 있던 생각이 나. (1·4 후퇴 때) 군인 가족이니까 배를 줘서 부산까지 갔다가 대구에서 대전까지 걸어왔어. 그 다음에 인천으로 온 거지.”

전쟁은 평범한 사람들 삶도 뒤흔들었다. 전선의 경계는 따로 없었다. 아군과 적군이 교차했고, 피난 행렬이 이어졌다.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는 한국전쟁 70주년을 앞두고 있던 2019년 인천 사람들이 겪은 전쟁 구술을 채록했다. 전쟁 한복판에 섰던 평범한 시민 목소리로 그때의 기억을 모았다.

중구 신흥동에 살았던 화교 임계성(1937년생)씨에게도 인천상륙작전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상륙 며칠 전부터 비행기가 매일 왔어요.” 그리고 1950년 9월15일 포격이 벌어졌다. “바다에는 군함이 있었거든. 우리 사는 집에 포탄이 하나 떨어져서 완전히 없어졌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1·4 후퇴로 임씨 가족도 피난길에 올랐다. “무의도로 갔어요. 두 집인가, 세 집이 조그마한 어선을 얻어서 몇 시간 걸려서 갔는데 그때는 멀리 간 줄 알았지. 근데 거기는 인민군이 안 왔어요.” 몇 달 뒤에야 그는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전쟁을 피해 서구 공촌동 이모네로 왔다가 인천에서 평생을 살아온 김태호(1946년생)씨에게 전쟁은 참혹한 기억으로 남았다. “지금의 석남동쯤 됐는데 어머니가 다리 밑으로 가다가 '이쪽은 보지 말고 가' 하고 붙잡아 매는 거야. 언뜻 보니까 죽은 사람들이 있는 거야. 그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어.”

남동구 간석동 집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여고를 다녔던 강분희(1932년생)씨는 1950년 6월25일 학교에서 전쟁 소식을 들었다. “친척들도 몰려오고 사람들도 다 우리 동네로 왔어요. 간석동하고 만수동 경계에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서 우리가 농장을 했는데 아버지가 거기 밑에다가 굴을 팠어요.”

인천상륙작전이 끝난 뒤 강씨는 '학도의용대'로 나섰다. “육촌동생과 같이 축현학교로 나갔어요. 거기서 남학생들은 걸어서 가기로 하고, 여학생들은 배를 타고 가게 됐어요. 부산을 향해서 갔죠.” 육군병원에서 부상자를 간호했던 강씨는 석 달여 만에 인천으로 돌아왔다. “치료해도 다 죽어요. 그렇게 많이 오는데 손볼 겨를이 못 됐어요. 간호는 못 하겠더라고요. 무서워서.”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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