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표적인 산림보호정책은 금표(禁標)를 세우는 일이었다. 나무, 특히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산 곳곳에 금표를 세웠다. 금표 안쪽에서 벌목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방목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쓰레기를 함부로 내다 버려도 안 되었다. 정조 임금 때에 강화에 세워진 금표에는 '가축을 놓아 기르는 자 곤장 100대, 재를 버리는 자 곤장 80대'라는 중벌이 명기되어 있다. 지은 죄에 비해 벌이 매우 무거워 보인다.
왕릉 주변은 훨씬 더 엄격하게 보호되었다. 일반 백성이 감히 왕릉 주변을 훼손할 일이야 있었겠는가마는, 어느 선까지 접근을 허용할지 경계를 확실히 설정해 해두어야 했다. 우선 능 울타리 밖으로 일정 범위의 화소(화소)를 설치했다. 화소란 산불이 능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미리 풀과 나무를 불살라둔 지대를 뜻한다. 드론으로 내려다본다면, 물이 담기지 않은 해자(垓子)처럼 보였을 것이다.
화소 밖으로도 백성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녹색지대가 한 번 더 설정되었는데, 이를 '외금양지(外禁養地)'라 했다. 외금양지 안에서는 나무를 벨 수 없고, 농경지를 조성한다든지 사사로운 분묘를 조성하는 일이 금지되었으며, 가축을 기를 수도 없었다. 어겼을 경우엔 곤장 100대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그린벨트”라는 설명(김희태·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이 재미있다.
화성시 봉담읍 융·건릉의 화소와 외금양지 경계는 당연히 두 번 설정되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을 화산으로 천봉하여 융릉을 조성할 때 한 번, 정조 승하 후 건릉이 들어선 후 한 번이다. 화소도 넓어졌고, 외금양지도 확대됐다. 외금양지는 보통리와 황구지천을 넘어 태봉산, 양산 서봉, 독산성, 노적봉으로 설정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융건릉으로부터 대략 반경 10리가량 떨어진 곳들이다.
화성시 태봉산에 남아 있던 '외금양계비'를 지난 22일 화성시가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했다. 화강암에 '外禁養界'(외금양지의 경계)라 음각한 이 표석은 조선 왕릉의 외금양지를 알리는 금표 가운데 유일한 실물이라 한다. 건릉 조성 시 두었던 화소 표석은 이미 모두 사라졌고, 외금양지 표석 중에서 서남쪽 봉담읍과 정남면 경계에 세워진 이 표석만 220년 세월을 견뎌냈다. 조선시대 산림정책의 산 증거인 화성시 외금양계비가 이제라도 문화재로 보호받게 됐으니 다행이다. 조그만 빌미라도 생기면 그린벨트를 해제하지 못해 안달인 시대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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