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골목 어귀에 붙은 오래된 포스터 한 장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광활한 설원, 발목까지 덮는 눈길을 한 사내가 포스터 속에서 걷고 있었다. 눈 속에 파묻힌 사내의 발이 시리고 아파 보였다. 아니, 시인의 발이 아파왔다. 시인이 집에 돌아 와 신발을 벗는데 피가 비쳤다. 발을 씻으며 아무리 살펴봐도 상처가 없었다. “오직 한 생각으로 먼 설원을 건너가다 보면// 가도 가도 없는 사랑을 앓듯, 상처 없이 피가 나오는 날도 있었다.” (이덕규 시인의 시 '상처 없이 피가 나오는 날도 있었다'의 마지막 두 연.)
이 시가 다시 떠오른 건 빙하학자 제마 위덤의 <빙하여 안녕> 소개 글을 읽다가 '빙하 장례식'이라는 단어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설원” 하면 나는 20세기 초 남극점 찾기 경쟁에 나선 노르웨이사람 로알 아문센과 영국사람 로버트 스콧이 썰매 타고 내달리는 광경이 먼저 떠오른다. 어린 시절 읽은 서양 탐험가 이야기가 깊이 각인된 탓일 게다. '빙하 장례식'은 아문센 스토리와 정반대인데도 그렇다.
일련의 기후학자와 지역전문가들은 2019년 8월 아이슬란드 최초의 빙하 오크외쿨의 장례식을 열었다. 이 거대한 얼음 덩어리는 2014년 사망판정을 받았다. 더는 빙하라고 불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남극점 탐험으로부터 불과 10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오크외쿨 빙하 외에 스위스 피졸 빙하, 미국 오리건의 클라크 빙하 등이 기후활동가들의 애도 속에 잇따라 장례식을 치렀다. 빙하 장례식에 갔다 오면 아마도 상처 없이 내 발에서 피가 흐르지 않을까? 가도 가도 없는 사랑을 앓듯 만년설이 사라지는 시대. 새로운 공감과 치유가 절실하다.
이덕규의 시집 <오직 사람 아닌 것> 첫머리에 '흰죽'이라는 시가 실렸다. “어느 가난한 흰빛의 최후를 수습한, 이 간결하고 맑은 슬픔은// 결백을 달이고 달여 치명에 이른 순백의 맑은 독 같아서// 험하게 상한 몸속의 사나운 짐승을 제압하는 일에 쓰인다네// 차마, 검은 간 한 방울 떨어뜨려// 흐린 제 마음 빛으로나 어둡게 받아야 하는 청빈의 송구한 맨살이라네” ('흰죽' 전문)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흰죽 한 사발 송구한 마음으로 먹고 싶다.
시인이 보기에, 쌀 한 톨 만드는 일은 하늘과 땅과 사람과 온갖 생물과 미생물이 함께 하는 울력이다. 그는 그중 사람 한 일이 가장 적다고 믿는다. 묵정논 같은 시인이 “오직 사람 아닌 것”에게 올리는 고수레 같은 시집 덕분에 더위도 잠시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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