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환희의 인천 체육 성지, 시민 기억 속 영원히]

1970년 착공·1973년 준공 '아시아 최대 실내체육관'
축구·야구 외 모든 경기 가능…3만명 수용 스탠드도
장정구 12차 챔프 방어전·홍수환 12R석패 '명승부'

국내 첫 인천체육전문대학·선인학원 16개 학교 사용
선인학원 시립화·인천전문대 흡수·인천체고 이전 이후
공실화로 애물단지 전락…주변 재개발 맞춰 철거 결정
2013년 돔 해체 이후 8월3일 강의동 폭파로 사라져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에 위치했던 당시 아시아 최대규모 실내 체육관 '선인체육관' 전경.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에 위치했던 당시 아시아 최대규모 실내 체육관 '선인체육관' 전경.

선인체육관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에 위치해 있던 아시아 최대 규모의 실내체육관으로 수용 인원이 3만 명에 달해 웬만한 실외 운동장 수준의 규모와 같았다.

내부에 육상 트랙, 농구·배구 코트, 유도장, 사격장, 검도장 등이 있어 거의 종합운동장 수준의 거대한 체육관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실내 공간으로 관중들을 압도했으며, 외관 역시 거대한 규모로 높은 지대에 우뚝 솟아있어 인천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다.

대형 체육관 건설이 일생의 꿈이었던 선인학원 이사장 백인엽에 의해 1970년 4월 착공해 3년 6개월 만인 1973년 준공한 동양 최대 규모의 체육관이었다. 선인체육관은 관객 3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탠드와 200m 트랙을 갖추고 있으며 트랙 안 플로어에는 매트 400장 넓이의 유도장을 비롯해서 사격장, 검도장, 그리고 각각 2면의 배구, 농구 코트가 마련돼 있어 축구와 야구를 제외한 모든 경기를 거행할 수 있는 다목적 실내체육관이었다. 전체 넓이 8500㎡ 규모의 체육관은 실내 바닥에 400m 육상 트랙까지 갖출 정도로 규모가 엄청났다. 400m 트랙 안에는 농구코트, 배구코트가 각각 2개씩 들어서 축구와 야구를 빼놓고는 어떤 종목의 국제경기도 치를 수 있었다.

당시 언론 매체들은 선인체육관 규모가 '장충체육관의 3곱'이라며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 지붕을 씌워놓은 것과 같은 규모'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연 30여만명이 동원되어 완공한 선인체육관은 3층의 로열박스까지 승용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완벽하였고 출입구 12개 외에 승용차 2500대의 주차장까지 구비했다.

가로 176m, 세로 142m의 이 매머드 실내체육관의 규모는 서울 장충체육관(연건평 2350평, 수용인원 8000명) 규모의 3배가 넘는 엄청난 것으로 돔 남북양쪽 끝에는 높이 60m의 14층 타워가 나란히 세워져있었다. 이 2개의 타워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인가를 받은 체부인 인천체부 학생들의 강의실, 연구실, 베드 2400개의 기숙사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한국스포츠의 일선지도자와 선수들을 배출한 요람이었다.

선인체육관을 완성하기위해 시멘트 60만부대, 철근 1만t이 드는 대공사였으며, 특히 이 체육관 건립은 순수한 한국 기술진만의 참여하여 높이 20m의 돔을 씌울 때 새 공법을 적용, 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1972년 개교한 인천체육전문대학은 비록 4년제 대학은 아니었지만 1977년 문을 연 한국체육대학교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선 대한민국 최초의 체육전문 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가 발전하고 명맥을 유지했던 배경에는 장충체육관에 이어 두 번째 종합체육관으로 자리매김한 선인체육관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아시아 최대의 사학인 선인학원 소속 16개 학교가 공동으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선인체육관은 지어졌으며, 선인재단 학교 건물들은 하나같이 크고 웅장하였는데, 선인체육관은 그 건물들 중에서도 제일이었다. 이 건물 공사에 선인학원 학생들과 교사들도 인부로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비교적 간단한 일에만 동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론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였다.

총 공사비 약 170억원이 투입되었고, 선인체육관에서는 국민에게 감동과 환희를 선사한 빅매치도 많이 열렸다. 1987년 4월 WBC 챔피언 장정구가 멕시코의 에프엔 핀터를 6회 KO로 물리치고 타이틀 12차 방어에 성공했을 땐 선인체육관에서 날아온 승전보에 온 국민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1976년 10월 '4전 5기'의 신화 홍수환이 선인체육관에서 멕시코의 알폰소 사모라를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이끌다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12회 KO패 했을 땐 진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국제규모의 스포츠 경기와 행사를 자주 개최하면서 인천시민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준 선인체육관도 시간이 지나자 인천시민들의 기억 속에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다.

경제의 급성장으로 인해 교육여건이 현저하게 좋아져 최신의 시설을 갖춘 실내체육관이 인천 곳곳에 들어서게 되자 선인체육관의 효용성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1994년 선인학원의 시립화 이후 선인체육관을 기반으로 한 인천전문대학이 2010년 3월 인천대학교와 통합 하게 되자 학생들이 인천대학교로 흡수된 것이었다. 2010년 통합인천대학교의 출범과 함께 인천전문대학이 폐교되자 선인체육관 양옆 65m의 강의동 한건물이 공실화되었다.

인천전문대학과 함께 반대쪽 한편의 건물을 차지하고 있던 인천체육고등학교도 36년간을 정들었던 선인체육관을 떠나 2012년 11월에 청라국제도시로 이전하여 이후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건물이 되었다. '동양 최대' 라는 명칭이 있는 체육관이었지만, 선인학원 건물들 대부분이 다소 부실하게 지어져 안전 문제가 제기되었고, 선인체육관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애물단지 신세가 됐다. 체육관 내부 냉난방 시설이 미비해 경기를 치르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 건물 노후화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1990년대 이후 선인체육관은 건물 노후화와 함께 가수들의 공연장, 씨름과 체조 등의 비인기 종목의 경기장으로 활용되며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인천시는 선인체육관을 리모델링해 인천체육회관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보존을 위한 개·보수비 용이 오히려 새로 짓는 것보다 더 많이 든다는 분석이 나오자 결국 철거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80년대 이후에는 대학 체육시설로도 활용됐지만 주변 구도심의 재개발과 함께 결국 철거가 결정된 것이다.

동양최대인 선인체육관은 별명이 많은데, 큰 규모에 걸맞게 '맘모스 체육관'이라는 별칭도 있고, 인근지역 초등학생들은 '마징가Z 체육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형 돔 양쪽으로 삐죽 솟아오른 14층 건물이 유명 만화영화 마징가Z 로봇의 머리모양을 닮았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또한 2005년 9월 인천 아시아육상경기대회가 열린 선인체육관을 찾은 북한응원단에 북한의 퍼스트레이디 이설주가 포함돼 있기도 했다.

▲ (왼쪽사진)2013년 8월 3일 선인체육관 남아있던 강의동 폭파하며 철거되는 모습. (오른쪽사진)인천시의 상징이고 인천 체육의 자랑 이었던 선인체육관이 도시 재개발 사업과 맞물려 4초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인천시는 결국 도화구역 도시개발사업에 선인체육관을 포함하기로 하고 철거를 결정했다. 인천시는 2013년 1월부터 천천히 철거를 시작하여 그 해 8월 3일 오전7시, 남아있던 강의동이 폭파되면서 철거가 완전히 끝났다. 선인체육관 철거공사는 인천도시공사의 도화지구 개발사업 추진을 위해 2013년 1월에 시작되어 돔 형태 체육관은 7월에 철거됐고 체육관 양옆에 있던 65m 높이의 건물 2채가 2013년 8월3일 마지막으로 철거되었다. 발파에는 298.5kg의 폭약이 사용되었으며, 30초 동안 건물 1층부터 13층까지 차례로 폭파되었다.

잠시 후 텅빈 그라운드가 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렇게 선인체육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70년대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선인 체육관은 인천시의 상징이고 인천체육의 자랑이었다. 숱한 감동과 환희를 선사했던 선인체육관이 인천시의 도시 재개발 사업과 맞물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선인체육관은 형체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많은 인천시민들의 기억 속엔 늘 살아있을 것이다.

/글 인천생각협동조합·사진 인천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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