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2월 개관 '시민 배움·피난처'
민중대학 개최·여대생 성고문 규탄
노동청년회 활동 해고자 복직 이끌어
노인강좌…대규모 문화 전시회 마련
답동성당 관광화사업에 '철거' 포함
2017년말 상인-시민단체 찬반 충돌
결국 철거…올 6월 '광장·쉼터' 재탄생
차분해야 할 세밑, 2017년 12월의 인천 답동성당 주변은 그렇지를 못했다. 여러 시민단체 관계자와 성당 주변 상인 등이 인천 중구가 추진하던 답동성당 앞 인천가톨릭회관 철거 문제로 충돌했다. 중구가 진행하던 '답동성당 일원 관광자원화 사업'이 발단이 되었다. 그 사업에는 인천가톨릭회관을 2018년 1월까지 철거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인천시민에게 가톨릭회관은 문화예술의 향유 공간이자 민주화 운동의 거점으로 인식돼 있다. 시민단체들은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가톨릭회관을 무작정 없앨 수는 없다면서 반발하고 나섰고, 낙후한 구도심에는 관광 활성화가 시급하다고 주장하는 성당 주변 상인 등이 시민단체의 반대 기자회견을 물리력으로 막아서면서 양측이 부딪쳤다. 인천교구가 관리하던 가톨릭회관은 2016년에 중구에 소유권이 넘어간 터여서 중구가 개발 사업에 나설 수 있었다.
1973년 12월 15일 개관한 인천가톨릭회관은 수많은 인천시민이 다양하게 이용하던 배움터이자, 휴식처이자, 피난처였다.
가톨릭회관 사업 구상이 교구 내에 공개된 것은 1970년 8월이었다. 나길모(나굴리엘모) 주교가 인천교구의 1971년도 '사업 계획서'를 사제들에게 회람시키면서다. 1971년도 연간 사업계획은 7개 항으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교구 센터 건립 계획'이 들어가 있었다.
'가톨릭 시보' 1972년 10월 14일 자는 외부 공사만 겨우 마친 상태에서 공사비 부족으로 인천 문화센터 건립 사업이 중단되었다고 보도했다. 1971년 5월 인천의 문화적 요람 역할을 위해 착공한 이 회관이 총 공사비 1억400여 만 원 중 3000여 만 원이 부족해 착공한 지 20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내부 공사에 손을 못 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고 가톨릭회관은 성탄 선물처럼 1973년 성탄절을 열흘 앞두고 개관식을 가질 수 있었다. 1971년 5월 7일 착공해 총 사업비 8400만 원 정도가 들었다. 지하 1층, 지상 5층에 연건평이 870여 평이었다.
가톨릭회관을 중심으로 무슨 활동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학력, 연령 제한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민중대학'이란 이름의 정기 강좌가 이루어졌다. 민중대학은 인천 가톨릭청년회가 주최했다. 제1기 강좌는 1984년 6월 12일부터 10월 20일까지 총 60강좌에 29명의 교수진이 참여했다. 1986년도에는 제4기 강좌가 진행되었는데 강사진이 고은, 장을병, 성유보, 송건호, 조광, 임진택, 제정구 등 유명 인사들로 채워졌다.
민중대학 4기가 진행 중이면서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다다르던 1986년 7월 7일, 인천교구 청년회 등 6개 단체가 가톨릭회관에서 부천경찰서 여대생 성고문 사건 규탄 대회를 갖고 관계자 처벌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경찰이 가톨릭회관 출입을 원천 봉쇄하는 바람에 약 30여 명밖에 입장하지 못했고, 주최 측은 옥외 스피커를 통하여 규탄 대회 내용을 건물 밖에서 들을 수 있도록 방송했다고 한다.
인천지역 노동운동의 핵심 주체가 되었던 가톨릭노동청년회(JOC)도 가톨릭회관을 자주 이용했다. 특히 1970년대 활동이 두드러진다. '가톨릭시보' 1976년 5월 2일 자 기사를 보자.
“인천 JOC 화수동 섹션은 25일 오후 1시 30분 가톨릭회관에서 근로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모임을 갖고 이들에게 JOC 소개와 각 직장의 문제점을 분과별로 토론하는 한편 그들과 함께 레크레이션으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이날 참석한 대다수의 근로자는 근로기준법조차 몰랐다면서 앞으로도 이러한 모임이 자주 있으면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동구 관할엔 한국판유리, 한국기계, 인천전기, 삼미사, 대성목재, 인천공작창, 동아제분, 동일방직 등 큰 공장들이 있다.”
이 짧은 기사 한 꼭지에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70년대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는 이렇게 시작된 거였다.
여기서 짧게나마 살펴본 인천가톨릭회관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활동이 우리 현대사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는 새삼 말할 나위가 없다. 70년대 노동자 학습 모임이, 80년대 금요강좌로, 또 민중대학으로, 그게 1986년 5·3으로, 또 1987년 6·10으로. 어떤 일이건 그 성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는 진리를 인천가톨릭회관의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말해준다.
가톨릭회관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가톨릭노동청년회(JOC)는 또 강화도가 한때 우리나라 직물산업의 본거지였다는 점도 알려준다. 1967년 5월, 강화도 성당 JOC 회원들이 주도가 되어 노조를 결성했다. '전국섬유노조 직할 심도직물분회'였다. 강화의 대표적 직물회사이던 심도직물은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 김재소가 설립한 회사였다. 단체협약 체결을 거부하던 사측은 1968년 1월 4일 노조 분회장을 무단 결근을 이유로 해고하면서 일명 '강화 사건'은 시작된다. 그 나흘 뒤 21개 업체나 되던 강화 소재 직물업자들이 모인 '강화직물업자협의회'가 천주교 JOC 회원은 채용하지 않고, 사상적으로 의심되는 신부가 물러나지 않으면 휴업도 불사한다는 등의 6개 항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노동자들이 아니라 공장 대표자들이 단체행동에 나선 거였다. 여기에는 김재소 국회의원의 끗발이 작용했을 터였다. 강화경찰서장까지 나서 일방적으로 회사 편을 들었다. 전국의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소속 회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해고 노동자를 위해 하루 한 끼 굶기 운동을 벌여가면서 쌀을 모아 강화도로 보냈다. JOC 총재를 맡고 있던 당시 김수환 주교까지 나섰다. 그는 강화 현지까지 직접 걸음했다. 며칠 뒤 한국천주교주교단 이름으로 노동자의 권익 옹호를 위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사건이 프랑스 가톨릭 잡지에까지 실렸고, 해고 노동자를 위한 전국의 모금 운동은 총액 11만 원을 넘겼다. 14명의 해고자를 낳았던 강화 사건은 결국 노동자들이 전원 복직하면서 일단락되었다. 1968년 7월 14일이었다. 당시 교황 바오로 6세의 뜻을 담은 바티칸 격려문이 한국 주교회의 의장 앞으로 전달되었다고 한다.
인천가톨릭회관에는 경기도 전역의 각 기업체 관계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73년 12월 22일에는 노동청 주관으로 가톨릭회관에서 경기도내 각 생산기업체의 안전관리자협의회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는 경기도 각 생산업체에서 80여 명이 모였으며, 노동청인천지방사무소장이 회의를 주재했다. 인천가톨릭회관이 경기도 전역을 위한 공공재 역할을 한 거였다.
인천가톨릭회관에서는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나 노인강좌가 펼쳐지기도 했다. 1977년 5월 6일에는 60세 이상 노인들을 초대해 경로잔치를 베풀었으며, 1980년 5월 7일에도 경로잔치를 가톨릭회관에서 마련했다. '60세 이상 노인'이란 내용에 새삼 눈길이 간다. 1982년 6월에는 가톨릭사회복지회가 가톨릭회관에서 노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이틀 동안 벌였다. 60세 이상 노인 200명을 대상으로 계획했는데 700여 명이나 참석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게 인천에서는 처음 실시된 노인 대상 강좌였다고 한다. 이후 정기 프로그램으로 개설했으며, 1984년 8월 31일에 제5회 강좌를 개최했다. 이때는 강의가 끝난 뒤에 국악공연도 펼쳤다고 한다.
그림이나 사진 등 각종 전시회도 자주 마련되었는데 200점이 넘는 대규모 전시회도 많았다. 이처럼 가톨릭회관은 문화예술 향유 공간뿐만 아니라 각종 교육 운동과 민주화를 위한 시위의 거점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가톨릭회관의 지난 역사를 오늘에 되살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회관 건물을 쓰러뜨린 후대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인천생각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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