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한국농어촌공사는 농업용수원 기능이 사라진 저수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공사 소유 토지 2조8000억 원어치 가운데 상당수가 저수지와 양수장 관련 땅이다. 정부가 효율성 떨어지는 국유재산(16조원) 매각 방침을 발표된 이래 공사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과연 저수지들을 팔 것인가?

예전에는 저수지로 불렸으나 지금은 호수로 개명한 곳이 많다. 백운저수지가 백운호수가 되었고, 원천저수지가 광교호수공원으로 바뀌었다. 물왕저수지는 물왕호수, 왕송저수지는 왕송호수, 청계저수지는 과천대공원호수로 호명된다. 저수지라 하면 왠지 새마을스럽고, 호수라 하면 왠지 신도시스러운 것일까? '물멍' 장소를 찾아 헤매는 도시인들을 유혹할 산뜻한 네이밍이라는 감각 때문일까?

우리나라 저수지는 삼국시대부터 축조되었지만, 근대식 저수지는 일제강점기 산미증식계획의 소산이다. 1920~30년대 전국에서 저수지 조성 운동이 진행됐다. 민간이 나서서 자발적으로 수리조합을 결성하고 저수지를 파는 형식을 취했으나 뒤에는 쌀 산출을 늘리려는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정책이 있었다.

시흥군을 예로 들면, 1929년 소래수리조합이 결성돼 계수저수지(소래저수지)가 만들어졌고, 1939년에는 칠리제공려수리조합과 매화공려수리조합이 구성되어 칠리제저수지와 도창저수지가 축조됐다. 1942년 흥부수리조합은 물왕저수지를 건설했다. 이들 저수지 덕분에 시흥의 천수답이 대부분 물 걱정 없는 논으로 변했으나, 실제 농민들의 삶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소작농들은 저수지 조성공사에 직접 동원되었고, 수확기에는 적지 않은 저수지물 사용료(수세)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산정호수 이야기도 있다.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 산꼭대기에 있는 이 호수는 자연호수가 아니다. 1925년에 축조된 저수지다. 높은 곳에 물을 가두어 아랫녘 들판을 적시자는 발상이 낳은 작품이다. 풍광이 용도를 압도해 일찍부터 유원지가 발달했다. 김일성이 별장을 짓고 싶어 할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경기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는 용인시 이동읍 어비리 이동저수지(송전지)다. 1960년대 말 이동저수지 담수가 시작되면서 370여 가구 2350여 명의 주민이 집과 농토를 통째로 수몰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동저수지도 완전 용도폐기 직전에 놓였다. 한국농어촌공사가 국유 저수지들을 팔면, 사들인 쪽으로서는 횡재일 터이다. 공공재산인 수변 풍광을 그렇게 사유화하는 것이 합당한가? 그보다는 공익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궁리하는 게 맞지 않나?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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