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6월 수원의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구국민단이 조직되었을 때 차인재는 교제부장을 맡았다. 차인재는 당시 삼일학교 교사로서, 삼일학교 출신들이 구국민단에서 활동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차인재 자신도 삼일학교 1회 졸업생으로서, 이화학당을 나와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구국민단이 왜경에 발각된 후 차인재는 매우 파격적인 선택을 한다. 사진 신부로 미국행을 택한 것이다.
미주 지역의 한인 노동자와 본국 여성 사이의 사진혼인은 1910년 말쯤 시작되었다. 호남 출신 여성이 하와이 이민자와 사진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 처음이다. 이후 1924년까지 하와이로 간 사진 신부가 951명, 미 본토로 간 경우가 115명이었다. “하와이에는 주로 영남 여성이, 미 본토에는 북한 여성의 이민이 많았다고 한다. 사진혼인은 외롭고 방황하던 동포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적지 않은 기여하였다.” (박환, <근대민족운동의 재발견>, 선인, 2022년)
사진만 보고 태평양을 건너간다는 건 인생을 건 모험이다. 차인재가 사진 신부가 된 경위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도박과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의 처지가 절박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따름이다. 사진혼인 한 부부는 남자가 나이를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여서 부작용도 컸다. 이역만리까지 갈 결심을 한 신부들은 신랑보다 대체로 학력수준이 높았다. 차인재는 고향(수원 북수동)에서 멀지않은 곳 출신(영흥도)인 임치호를 만나 1920년 8월 나성(로스엔젤리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 임치호는 상업에 종사하면서 대한인국민회 나성지방회장을 역임한 독립지사였다. 항일 전력 때문에 미국행을 택한 차인재로서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미국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 임인재가 된 그는 대한여자애국단에서 교육활동과 독립 군자금 모금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30년대에는 대한인국민회 나성지방회, 1940년대에는 대미한족연합회에서 활동하였다. 젊어 품은 뜻을 어떻게 하든 실천하려 한 인생역정이 존경스럽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차인재(車仁載·1895~1971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수원 구국민단에서 활동한 차인재가 미주에서 활동한 임인재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수원대학교 사학과 박환 교수에 의해 사료를 통해 뒤늦게 밝혀졌다. 지난 6일 출판기념회를 한 박 교수의 저서 <근대민족운동의 재발견>에는 차 선생의 행적 말고도 현장조사와 구술 등을 통해 발굴해낸 흥미로운 사례들이 여럿 나온다.
/양훈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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