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죽어가다 - 황병승

그러나 나의 악기는 아직도 어둡고 격렬하다

그대들은 그걸 모른다,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그때 그대들을 나무랐던 만큼 그대들은 또 나를 다그치고

나는 휘파람을 불며 가까스로 슬픈 노래의 유혹을 이겨내고 있는데

오늘 밤도 그대들은 나에게 할 말이 너무 많고

우리는 함께 그걸 나눠 갖기는 틀렸구나,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불의 악기며 어둠으로부터의 신앙(信仰)……

그렇다, 나는 혼돈의 음악을 연주하는 대담한 공주를 두었나니

고리타분한 백성들이여,

기절하라! 단 몇 초만이라도

내가 뭐, 라는 말밖에 나는 할 수가 없구나

저기 붉은빛이 방문하고 푸른빛이 주저앉는다

라는 암시밖에는 할 수가 없구나

▶ 이 시대는 차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변혁을 꿈꾸던 왕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이 시대는 “어둡고 격렬하다”. “그대들은 그걸 모른다,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던 왕은 변혁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왕은 “혼돈의 음악을 연주하는 대담한 공주를 두었”다. 아직 변혁의 빛, 희망이 남아있는 것이다. “혼돈의 음악”은 질서로 일원화되지 않은, 차이들이 차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파편성이 인정되는 음악이다.

질서가 아닌 “혼돈의 음악을 연주하는 대담한 공주”는 왕이 이루지 못한 변혁을 완성할 새로운 시대의 왕이 될 것이다. “대담한 공주”는 인위적인 질서로 획일화된 세계가 아닌 다양성을 인정하는 나라를 만들 것이다. 이성과 질서를 안정과 평화라 믿는 “그대들”의 “푸른빛”은 혼돈의 “붉은빛”에 스러질 것이다.

아직은 어둡지만 이제 곧 “대담한 공주”의 “붉은빛”이 방문할 것이니, “재앙의 날들이여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다오”.

▲ 권경아 문학평론가.
▲ 권경아 문학평론가.

/권경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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