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도서관-박상순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핀란드 도서관에는, /따뜻한 불빛, 제멋대로 놓여 있는 책들, 달콤한 것들.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하늘에서 쏟아질 듯, 따뜻한 밤이었음. /노르웨이, 스웨덴, 그 옆의 핀란드는 아니었음. 도서관도 /아니었음. 처음에는 나도 알지 못했음. /입구에 누군가가 써놓은 작은 글씨 하나, 핀란드 도 /서관. 윗줄에 '핀란드 도' 그리고 조금 아랫줄에 '서관' /그런 핀란드였음.

〈중략〉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핀란드 도서관에는, /아무도 없음, 아무도 못 들어옴. 아무도 모름. 누구도 /찾지 않음, 노란 깃발 벽에 걸고, 나만 살고, 나만 놀고, /따뜻한 불빛, 제멋대로 놓여 있는 책들, 달콤한 것들.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하늘에서 쏟아질 듯, /그런대로 따뜻한 밤이었음. 삑삑삑, 후다닥, 그 선수 /어디론가 사라지고, 쿵쿵쿵, /아랫집의 한 사내, 어젯밤 사망했다는 소리. 개울 건너 /오른쪽 집, 그 할아버지 사망했다는 소리, /이 산 저산, 무슨 산, 또 무슨 산의 /내 숙명 같은 노루도, 나를 닮은 어린 짐승들도 산불에 /새까맣게 타 죽었다는 소리, 못살겠다는 소리, /죽는다는 소리, 죽었다는 소리, 더는 못 놀겠다는 소리, /지랄, 지랄, 지랄, 지랄, /핀란드 도서관의 문짝 갈라지는 소리. 벽에 걸린 노란 깃발 떨어지는 소리. 그래도 아니 그런 척, /아니 죽은 척, 귀 막고, 원하는 만큼 충분히, /원하는 행복 충분히, 원하는 고통 충분히, 원하는 슬픔 /충분히, 나만 살고, 몰래 살고. 아니 죽은 척 살고…… /따뜻한 불빛, 내 눈에만 불빛, 사라지는 불빛. /진짜 노란 깃발 펄럭이는 소리, 핀란드 도서관 무너지는 소리. 내 소리 끊어지는 소리. /

▶ 한때 노르웨이나 스웨덴, 핀란드 같은 북쪽의 나라에 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저 북쪽 얼음나라에 대한 막연한 환상 같은... '핀란드'라 소리내어 보면 왠지 그곳은 이 세상에는 없는 그런 세계인 듯한. 이 시에서 '핀란드'는 있으면서 없는, 없으면서도 있는 그런 공간. '노란 깃발'은 어디에 있는가. 있지도 않은 '노란 깃발' 때문에 “마음의 벽”을 세워야 하는 세상. 그럼에도 '노란 깃발'은 있다. “진짜처럼 만들”어 벽에 걸어둔 '나'가 있으니 '노란 깃발'은 있다.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고 믿고 있는 '나'가 있는 한 있다. 그런데 '서관'이 무너진다. 함께 살아가는데 “아무도 없음”이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지. “입 다물고 눈 감”게 되는 세계에서 결국 “나만 살고 나만 놀”아야 하는가. “아니 죽은 척 살”아야 하는가. 아니다. '핀란드'는 그곳에 있음을 안다. 그곳에 있을 것이다.

▲ 권경아 문학평론가.
▲ 권경아 문학평론가.

/권경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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