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들의 저녁 - 이재훈

 

혼자 남을 때가 있다.

아무도 없고 아무 가진 것도 없이

두려운 가난만 남아 저물 때가 있다.

무리를 떠나 빈방에 돌아와

두부 한 조각에 막걸리를 들이켤 때.

빈속에 피가 돌고 몸이 뜨거워질 때.

문득 빈 것들이 예쁘게 보일 때가 있다.

조금 더 편하기 위해 빚을 지고

조금 더 남기기 위해 어지러운 곳을 기웃거렸다.

가진 것 다 털고 뿌리까지 뽑아내고

빈 들이 된 몸.

빈 몸에 해가 저물고 잠자리가 날고

메뚜기가 뛰어다닐 때.

아름다운 것을 조금쯤 알게 되었다.

들에 앉아 남은 두부 한 덩이 놓고

저무는 해를 볼 때.

세상의 온갖 빈 것들이 얼마나 평온한지.

얼마나 아름답게 우는지.

서로 자랑하듯 속을 비워내고 있다.


▶ 삶이 이토록 힘겨운 것은 '비워낸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더 편하기 위해”, “조금 더 남기기 위해” 빚을 지고, 어지러운 곳도 기웃거린다. 조금 더 갖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마음 가지 않는 길을 걸었던 걸까.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불편한 마음은 “무리를 떠나 빈방에 돌아와” 비로소 느끼게 된다. 혼자 남아 “두부 한 조각에 막걸리를 들이켤 때” 그제서야 빈속에 피가 돌고 몸이 뜨거워진다. 무엇을 더 갖고 싶었던 것일까. 무리를 떠나 빈방에 돌아와 혼자되었을 때 비로소 맞게 되는 평온. “들에 앉아 남은 두부 한 덩이 놓고 저무는 해”를 바라볼 때.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는 것은 눈물겨운 일이다. 비워내고서야 편안해진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어지러웠던 이야기들을 이제는 지운다. “무리를 떠나” 비로소 보게 되는 “빈 것들”의 평온을 위해 '비우고 또 지운다.

 

▲권경아 문학평론가.
▲권경아 문학평론가.

/권경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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