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맛 비교해가며 도정기술 개발한 건 나밖에 없어”

미곡종합처리장 생긴 뒤로 정미소 많이 없어졌어
우린 찹쌀로 갈아타고 버는 족족 설비에 투자했지

기계 많아져 남들 고온건조할 때,
저온에 천천히 빠싹 말렸어

부러짐 없이 매끈하게 깎이니 맛도 차원이 다르지

몇 톤씩 무조건 많이 빼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더뎌도 맛 지켜내는게 제일이지

쌀은 생명을 잇는 끼니였고 우리 문화는 쌀을 중심으로 피어났다. 서구화된 식단에 밀려 점차 우리 밥상에서 멀어지고 있는 '쌀'. 동시에 사라져 간 '쌀의 추억'. '천년밥상, 경기米이야기-농쌀직썰 2부'에서는 경기미의 옛이야기를 쫓아 쌀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경기인들의 쌀 문화, 쌀에 대한 '썰(設)'을 풀어본다.

 

▲ 이천 경사정미소 50년 주인장, 이기섭씨가 위풍당당한 자태로 자신의 정미소를 소개하고 있다.
▲ 이천 경사정미소 50년 주인장, 이기섭씨가 위풍당당한 자태로 자신의 정미소를 소개하고 있다.

# “정미소는 필요 없어졌어. 게다가 쌀들을 전혀 안 먹으니깐.
정미소가 동네마다 있던 게 지금은 6개 밖에 안 남았어.”

예전에는 동네 모든 길이 정미소로 이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정미소는 마을의 중심이었다. 사시사철 방아가 돌아가고 동네 사람들은 벼가 쌀이 되길 기다리며 웃음꽃을 피웠다.

이천 경사리에는 오래된 정미소가 있다. 육중한 기계들이 50년 넘도록 버티고 있는 이곳에선 여전히 '벼'가 '쌀'로 태어난다. 이기섭(71)씨는 1970년대 초반부터 친형과 함께 정미소의 주인장을 지냈다.

“형하고 같이 정미소를 했어. 쌀밥이나 실컷 먹어보자 해서 차린 게 경사 정미소야. 미곡종합처리장(RPC)이 들어오면서부터 형은 정미소 일을 그만뒀어. 내가 땅 서마지기를 형에게 주고 정미소에 안방을 꿰찼지.”

야심 차게 정미소 운영에 나섰지만 늘 그렇듯,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RPC에서 수매를 하기 시작하면서 정미소는 필요 없어졌어. 게다가 쌀들을 전혀 안 먹으니깐. 정미소가 동네마다 있던 게 지금은 (이천기준) 6개 밖에 안 남았어.”

 

▲ 이천 경사정미소 50년 주인장, 이기섭씨가 위풍당당한 자태로 자신의 정미소를 소개하고 있다.
▲ 이천 경사정미소 50년 주인장, 이기섭씨가 위풍당당한 자태로 자신의 정미소를 소개하고 있다.

# “다른 곳에는 2대, 3대 있던 기계가 우리 정미소는 7대나 있었어.
쌀을 팔고 번 돈으로 설비에 투자했으니깐. 이만한 정미소 없다고. 우리 정미소에서 도정한 쌀이 맛있다고 해.”

농협 RPC의 등장으로 방앗간이나 정미소들은 사양길에 들어서게 됐다. 한 집 건너 하나 있던 동네 정미소들은 문 닫는 일이 많아졌다. 평생 모은 돈으로 어렵사리 문을 연 정미소였다. 이씨에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멥쌀 말고 찰벼를 가져다 찧으면 되겠더라고. 그때부터 우리 정미소는 찹쌀 전문이 됐지. 일감이 물밀 듯이 들어왔어. 왜 우리덜 어린시절 찰떡이라면 환장했잖아. 여주며 안성이며 저기 전라도 장수까지 가서 찰벼를 사 왔다니깐. 찹쌀이 없어서 못 팔때니깐 오죽하겄어. 수매해 온 찰벼 가지고 밤새 깎아대는 거지.”

별 보고 나갔다 별 보고 들어오는 일이 많아졌다. 전국팔도 찹쌀 산지를 찾아다니며 죄다 정미소로 사들였다. 애당초 이씨가 운영하는 '경사 정미소'는 뛰어난 도정 솜씨 덕에 제법 입소문이 나 있던 터였다. 1년 내내 쉴 새 없이 정미소 기계가 돌아갔다.

“다른 곳에는 2대, 3대 있던 기계가 우리 정미소는 7대나 있었어. 쌀을 팔고 번 돈으로 설비에 투자했으니깐. 이만한 정미소 없다고. 우리 정미소에서 도정한 쌀이 맛있다고 해. 그 비법이 바로 저온건조야. 기계가 많았으니깐 저온건조가 가능했다고. 다른 정미소는 2대, 3대로 돌려야 하니깐 고온에 불을 지펴서 빨리 말려야 했어. 그런데 우리 정미소는 자연건조하다 시피 불을 지피지 않고 7대로 온전히 말리고 있지. 그렇다 보니 맛이 좋을 수밖에…”

이씨의 정미소는 이천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가 쌀을 팔아 벌어들인 돈은 고스란히 정미소로 들어갔다.

“우리 정미소는 문 닫을 일도 없어. 워낙 완고하게 설비를 들여놓아서. 내가 또 목수일을 해서 손재주가 좋아. 기술자보다 더 잘해. 고장이 나도 사람 안 부르고 내 손으로다가 뚝딱 고칠 수 있으니깐. 쬐끄만 방앗간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RPC저리 가라 할 만큼 커졌지.”

 

 

▲ 이천 경사 정미소에서 도정된 쌀로, 부러짐 없이 매끈한 낱알이 특징이다.
▲ 이천 경사 정미소에서 도정된 쌀로, 부러짐 없이 매끈한 낱알이 특징이다.

# “부러지지 않게 쌀을 깎는 것도 기술이야.
쌀에 맞춰 기계를 개조했기 때문에 기술이 다른 데랑 차원이 다르다니깐. 밥을 먹어가면서 기술 개발한 사람은 나밖에 읎어.”

1년 내내 돌아가던 정미소 기계는 이제 멈춰 있는 날이 더 많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몇몇 동네주민들이 전부지만 도정 솜씨만큼은 여전하다.

“우리 정미소 쌀은 빠짝 말려서 깎기(도정) 때문에 밥맛이 좋아. 다른 곳은 16% 정도까지 말린다면 우린 14%까지 저온건조를 하지. 누구는 미쳤다고 할지도 몰라. 이렇게 쌀을 빠짝 말려서 깎는 건 우리 집 밖엔 없을 테니깐. 부러지지 않게 쌀을 깎는 것도 기술이야. 쌀에 맞춰 기계를 개조했기 때문에 기술이 다른 데랑 차원이 다르다니깐. 밥을 먹어가면서 기술 개발한 사람은 나밖에 읎어.”

여주 사는 농부 김씨가 왔다. 안성 사는 박씨도 이천까지 먼 걸음을 마다치 않는다. 그중 까다롭기로 소문난 최씨 내외도 이곳 이씨의 정미소만을 고집한다.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해선 도정 기술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이 이씨를 찾는 데는 그의 빼어난 도정기술 때문이다.

“최씨 내외가 도정하러 가서는 다 할 때까지 지켜본다고 했어. 그런데 우리 정미소에 올 땐 지켜볼 필요 없다고 해. 그만큼 우리 정미소가 신용을 얻은 거지.”

 

# “몇 톤씩 무조건 많이 빼는 게(도정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맛을 지켜내는 게 중요하다고.
비록 시간이 더디더라도 남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만들라고.”

멈춰 있는 기계들에는 먼지 한 톨 없다. 하루도 빠짐없이 가꿔온 탓이다. 손 때가 묻은 망치, 스패너도 50년 넘도록 건장한 기계 한 편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비록 지금은 가을 방아 한철에만 돌아가는 기계일지라도 이씨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시절은 변했고 벼가 무르익어 햅쌀이 나오기 시작한 이맘때쯤 농부들로 북적이던 정미소의 풍경도 사라졌다. 정미소는 녹슬어 갔지만 오랜 시간 그 자릴 지키는 나무처럼 우리네 삶 속 정미소가 지닌 나이테는 촘촘해져 간다.

이기섭씨의 정미소, 남루하지만 농부들의 삶과 애환이 묻어난다. 오늘도 정미소는 만추의 볍씨처럼 황금 들녘 속으로 익어가고 있다.

“일찌감치 아들한테 넘겨줬지만 아직까진 내 손이 필요해. 아들한테도 항상 얘기하는 게 있어. 몇 톤씩 무조건 많이 빼는 게(도정하는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맛을 지켜내는 게 중요하다고. 비록 시간이 더디더라도 남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만들라고…”

 


 

[경기인의 밥상] 게걸무 무침

▲ 이천 지역에서 나는 게걸무로 무친 장아찌 무침이다. 소금에 절인 게걸무를 썰어 넣은뒤 갖은 양념으로 맛을 냈다.
▲ 이천 지역에서 나는 게걸무로 무친 장아찌 무침이다. 소금에 절인 게걸무를 썰어 넣은뒤 갖은 양념으로 맛을 냈다.

게걸무는 경기도 이천의 목화밭이나 콩밭사이에서 재배되어 온 토종 무이다. '게걸스럽게 먹는 무'라는 것에서 명칭을 따왔다고 한다.

일반 무와 달리 껍질이 두껍고 단단해 매운맛이 난다. 생김새는 납작하고 팽이의 형태와 닮아있다. 쉽게 무르지 않아 대개 절임으로 먹는다.

게걸무 김치는 3000년 전 중국 문헌 '시경'에서 처음 소개되었는데, 산미로 담그는 염초법, 소금과 발효를 이용하는 발효저법, 장아찌를 담그는 염장법 등이 기록돼 있다. 소금에 절여 땅에 묻었다가 겨울이 지난 후에 먹을 수 있는데, 겨울이 지난 후에 꺼내 먹으면 맛이 시원하고 상큼하다.(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특히 게걸무 씨앗은 칼륨, 칼슘, 마그네슘 등이 풍부하고 항암효과에 뛰어나 기름으로 짜서 먹기도 한다.

“무가 딱딱해서 가을에 절였다가 여름에 먹곤 했지. 김치로 먹기도 하고 게걸무를 시원하게 국물을 우려내거나 무쳐 먹었어.”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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