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흐느낌

                                                                신기섭

이 밤 마당의 양철 쓰레기통에 불을 놓고

불태우는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

우르르 솟구치는 불씨들 공중에서 탁탁 터지는 소리

그 소리 따라 올려다본 하늘 저기

손가락에 반쯤 잡힌 단추 같은 달

그러나 하늘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검은색,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일순간

그해 겨울 용달차 가득 쌓여 있던 분홍색,

외투들이 똑같이 생긴 인형들처럼

분홍색 외투를 입은 수많은 할머니들이

나의 몸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이제는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들이

검은 하늘 가득 분홍색을 죽죽 칠해나간다

값싼 외투에 깃들어 있는 석유 냄새처럼

비명의 냄새를 풍기는 흐느낌

확 질러버리려는 찰나! 나의 몸속으로

다시 돌아와 잠잠하게 잠기는 분홍색 흐느낌

분홍색 외투의 마지막 한 점 분홍이 타들어가고 있다

 

▲ 누군가가 떠나간다. 누군가를 보내는 것은 내 삶의 일부를 보내는 일. 속수무책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한 밤 떠나간 사람의 '분홍색 외투'를 불태운다. 불씨들은 솟구쳐 하늘을 검게 가득 채우지만 떠나간 이의 분홍빛 기억들이 “나의 몸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들”이 솟구쳐 검은 하늘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검은 하늘을 분홍색으로 물들이고 나의 몸속으로 다시 돌아와 잔잔한 '분홍색 흐느낌'으로 잠기는 것. 누군가가 떠나간다는 것은 슬픔을 남기지만 아름다운 분홍빛 추억으로 오래도록 불타오른다.

한 세계가 떠나간다. 남겨진 이에게 아련한 흐느낌을 남기고.

▲ 권경아 문학평론가.
▲ 권경아 문학평론가.

/권경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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