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야간 버스 안에서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저장된 이름 하나를 지운다

내 사소한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더듬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나를

일격에 넘어뜨리는 가로등,
일어나지마라

쓰러진 몸뚱이에서
어둠이 흘러나와
너의 아픔마저 익사할 때

그리하여
도시의 휘황한 불빛 안이
너의 무덤속일 때

싸늘한 묘비로 일어서라
그러나 잊지 마라

묘비명으로 새길 그리운 이름은

그립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이다 그리움을 잃은 삶은 이미 생명력을 다한 식물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추동력은 과거에서 나오고, 과거는 이미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금 시시각각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현재가 낳은 실존적 산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추억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하며, 생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그리움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시인 박목월은 젊어 한때 사랑한 한 여인을 평생 잊지 못하다 임종을 예감한 어느 순간, 지팡이를 짚고 불현듯 그 여인을 찾아가 그리운 얼굴을 본 후 임종을 맞았다. 또 한국인이 사랑한 수필 '인연'에서, 소녀 아사코를 사랑한 작가는 거의 일평생 아사코를 그리워하며 회상하고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그리움은 작가의 현실적 동반자가 존재하느냐에 관계없이 인간의 순수함으로서의 진솔한 감정에 속하는 영역이다. 이 두 사례만 봐도, 그리움이라는 실존적 과거가 우리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승화시키는지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리운 이름'과 결실을 맺었다면 그리움은 생겨나지 않았을까? 답은 '아니다'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 나서 혼자 떠나는 고독한 존재여서, 반려의 유무와 무관하게 일평생 그리움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일상에 함몰돼 살아가더라도, 기억의 건너편에서 떠오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길을 걷다가 차를 마시다 문득문득 가슴 벅찬 선명한 그 무엇이 분명 있다. 그리하여 이 시의 화자는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지웠을망정, 가슴으로 '그리운 이름'을 지우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삶의 존재증명이며, 사랑을 놓치지 않는 길이니까.

죽어서까지 그 무덤의 묘비가 되어 이름을 새기고 싶은 '그리운 이름', 그런 애틋한 이름 하나 가슴에 숨겨두고 사는 것은, 삶의 아름다움일 뿐, 분명 죄는 되지 않을 것이다.

배홍배 시인은 최근 <라르게토를 위하여>란 시집과 <클래식 명곡 205>란 음악 비평서적을 상재했으며, 한국의 오지탐험가로서 전방위적 문학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br>
▲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



관련기사
[시, 아침을 읽다] 낮잠-남진우 낮잠-남진우헌책방 으슥한 서가 한구석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내 들춰본다먼지에 절고 세월에 닳은 책장을 넘기다낯익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아, 전생에 내가 썼던 글들 아닌가전생에서 전생의 전생으로 글은 굽이쳐 흐르고나는 현생의 한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잡고 있다한 세월 한 세상 삭아가는 책에 얼굴을 박고알 수 없는 나라의 산과 들을 헤매다 고개를 드니낡은 선풍기 아래 졸고 있던 주인이 부스스 눈을 뜨고이제 문 닫을 시간이라 말한다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 으슥한 서가 한구석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책을 꽂고조용히 돌아서 나온다▲ 누군가 [시, 아침을 읽다] 한 발, 첫 발자국-박남준 한 발, 첫 발자국-박남준새의 노래를 듣기 위해 새장을 사지 않고주머니를 꺼내 모이 그릇에 채워놓지 않고한 그루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며향기로운 그늘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꽃을 꺾어 창가에 놓지 않고꽃씨를 뿌리며 그 꽃씨가 퍼져나가세상을 물들이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제 몸의 온기를 나누어쫓기고 지친 마음을 껴안을 수 있다면한 뼘은 더 따뜻해질 것이다우주의 시간이 빛날 것이다새해 첫 마음 한 발, 첫 발자국,내 안의 바로 너나 또한 세간의 문을 열고 그 길에 한 걸음내딛는 시작이기를▲ 새해 첫날, '한 발, 첫 발자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