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 떠 있다

▶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넋 놓고 앉았다가 우연히 받게 되는 밧줄 같은 것이라는 시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냥 그렇게,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부둣가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온다. 그 밧줄을 아니 잡을 수 없다. 뛰어가 배를 매게 되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우연히 던져진 밧줄을 받아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천천히 다가와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 떠 있”는. 멀어지지도 않고 내가 있는 육지로 올라오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울렁이며 온종일 떠있는 배로 인해 나는 오래도록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 권경아 문학평론가.
▲ 권경아 문학평론가.

/권경아 문학평론가



관련기사
[시, 아침을 읽다] 빈 들의 저녁-이재훈 빈 들의 저녁 - 이재훈 혼자 남을 때가 있다.아무도 없고 아무 가진 것도 없이두려운 가난만 남아 저물 때가 있다.무리를 떠나 빈방에 돌아와두부 한 조각에 막걸리를 들이켤 때.빈속에 피가 돌고 몸이 뜨거워질 때.문득 빈 것들이 예쁘게 보일 때가 있다.조금 더 편하기 위해 빚을 지고조금 더 남기기 위해 어지러운 곳을 기웃거렸다.가진 것 다 털고 뿌리까지 뽑아내고빈 들이 된 몸.빈 몸에 해가 저물고 잠자리가 날고메뚜기가 뛰어다닐 때.아름다운 것을 조금쯤 알게 되었다.들에 앉아 남은 두부 한 덩이 놓고저무는 해를 볼 때.세상의 온갖 빈 [시, 아침을 읽다] 핀란드 도서관-박상순 핀란드 도서관-박상순원하는 만큼 충분히. 핀란드 도서관에는, /따뜻한 불빛, 제멋대로 놓여 있는 책들, 달콤한 것들.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하늘에서 쏟아질 듯, 따뜻한 밤이었음. /노르웨이, 스웨덴, 그 옆의 핀란드는 아니었음. 도서관도 /아니었음. 처음에는 나도 알지 못했음. /입구에 누군가가 써놓은 작은 글씨 하나, 핀란드 도 /서관. 윗줄에 '핀란드 도' 그리고 조금 아랫줄에 '서관' /그런 핀란드였음.〈중략〉원하는 만큼 충분히. 핀란드 도서관에는, /아무도 없음, 아무도 못 들어옴. 아무도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