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15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7만5000여명의 병력과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해군 함정을 투입해 인천에 기습 상륙하는 작전을 성공시켰다. 이로써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점령에 이어 서울까지 탈환한 뒤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 불리했던 한국 전쟁의 전세를 단숨에 뒤집었고 인천상륙작전은 세계전쟁사에 한 획을 그은 작전으로 남게 됐다.

당시 유엔군과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북한군의 총공세에 맞서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불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계획했지만, 상륙지역으로 처음 생각한 곳은 군산이었고 인천은 반대했다.

인천은 ▲7~9m에 달하는 큰 조수간만의 차 ▲썰물 시 드러나는 2~5㎞의 갯벌 ▲만조 시 유속이 매우 빠르고 좁은 단일 수로 ▲상륙지 주변의 높은 방파제 등으로 상륙함과 상륙병력의 접근이 불리하다는 게 반대 논리의 근거였다.

하지만 인천이 상륙작전에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을 결정하고 반대하던 참모들을 설득한 핵심 근거가 바로 상륙작전의 최대 목표인 '낙동강 전투'에 배치된 북한군을 지탱하는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군산은 상륙조건 자체는 양호하지만 북한군의 보급선을 막을 수 없는 반면, 인천은 북한군의 주요 보급선인 평양~서울~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철로와 도로를 끊어 맥아더 장군이 원하던 적 후방의 완전 단절이라는 타격을 줄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또 유엔군과 국군의 향후 북진작전 때도 인천항을 주보급항으로 사용해야만 작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결국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8월 28일에 승인하고, 맥아더는 '크로마이트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D-데이 9월15일'에 맞춰 인천에서 상륙작전에 성공했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한반도의 배꼽'이 인천이라고 한다. 호랑이 형상을 닮은 한반도 지형에서 인천은 호랑이의 배꼽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엄마와 뱃속 아기를 연결하는 생명선인 탯줄의 흔적인 배꼽이 사람 에너지의 원천인 것처럼 인천은 한반도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맥아더는 전쟁에서 최전선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보급로는 승전과 패전을 가르는 원천이라는 점에서 인천을 선택했다.

물론 맥아더가 인천이 '한반도의 배꼽'이라는 점을 알고 선택했을리는 없지만, 인천이 지정학적으로나 군사전술적으로나 역사를 바꾸기에 충분조건을 갖춘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는 인식을 갖고 상륙작전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승철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