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외항선 타고 세계 누빈 마도로스
▲ 고 김성택씨가 일본 상선에 근무 당시 3만t급 새 선적을 수주해서 가져오며 선장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김노천씨
▲ 고 김성택씨가 일본 상선에 근무 당시 3만t급 새 선적을 수주해서 가져오며 선장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김노천씨

“외항선 선장이셨던 아버님은 보통 1년에 한번, 길게는 3년 만에 귀국하실 때 뵐 수 있었어요. 제가 중학교 때는 입학하면서 뵙고 고등학교 들어갈 즈음에 다시 볼 수 있을 정도였어요. 외국의 생활이나 문화에 익숙해서인지 자식들에게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갖도록 하셨지만 '성실과 근면'은 당신이 몸에 밴 것처럼 늘 강조하셨어요.”

고 김성택(1931년 3월28일~2021년 4월1일)씨는 인천 동구 송림동에서 태어나 동산중·고와 부산 국립해양대학교 항해과를 졸업했다. 고등학생 때는 등록금을 면제 받기 위해 권투선수로 활약했다. 대대로 선주 집안이었던 황해도 해주 본가와 연결이 끊기자 집에서 학교를 보내줄 형편이 안됐기 때문이었다. 영어를 잘해서 당시 학익동 미군 부대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동산고 3학년 때 6·25전쟁이 터지자 피난 내려간 부산에서 미 해군 통역관으로 발탁돼 일본 오키나와 해군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사령관 추천으로 입학한 해양대에서 항해사 자격증을 따고 졸업하며 바로 외항선을 타기 시작했다. 중간에 잠깐 부평 미군부대에서 주방 책임자로 일했던 시기를 빼면 70세까지 30년 넘게 외항선을 타고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고인의 막내아들인 사진작가 김노천씨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사진 동호회에 들어가면서 카메라를 잡게 된 계기도 아버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당시 쉽게 가질 수 없었던 카메라 등 외국산 전자제품이 집에 있었지요.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하면서 렌즈 등 각종 장비와 사진 관련 서적도 아버님을 통해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었고 제가 프랑스 파리 유학을 마음먹을 수 있었던 것도 아버님의 영향이 적지 않았어요”라며 말했다.

고 김성택씨는 은퇴 후 친구들과 만나거나 아파트 주민들과 어울리며 생활을 하던 중 지난해 1월 코로나19 사태로 경로당이 폐쇄되면서 외부 활동을 못하게 되면서 기력이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 차례 응급실에 실려 갔지만 '노환이라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다'는 말을 듣고 8월부터 요양병원에서 생활하다 지난 4월1일 영면했다.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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