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땅 한강하구에 평화의 배 띄우자
금단의 땅 한강하구에 평화의 배 띄우자
  • 정찬흥
  • 승인 2021.03.03 17:50
  • 수정 2021.03.03 17:50
  • 2021.03.04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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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2020년 7월 27일 개최된 ‘한강하구 중립수역 선포식’에서 민족춤협회 회원들이 ‘평화의 춤’을 선보이고 있다.

한강하구 중립수역은 육상의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 MDL)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서해의 시작점인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까지의 구역을 일컫는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에서 시작해 김포시와 인천시 강화군을 지나며 북쪽은 황해도 개풍군, 배천군, 연안군을 통과한다.

이 곳을 중립수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장을 하지 않은 민간 선박이라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운항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유엔사가 통제하는 육상의 군사분계선 주변에서 민간인의 접근이 철저하게 차단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뒤 맺어진 한국군사 정전협정(military armistice in Korea)은 분명히 이런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한강하구는 휴전 이후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금단의 구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강하구 평화의 배 백서.

한강하구 '평화의 배' 백서 발간

시민사회단체와 평화애호가들은 한강하구를 '평화의 바다'로 되돌리기 위해 20여 년 전부터 이 곳에 '평화의 배'를 띄우는 운동을 벌여왔다. 정치상황이 바뀔 때마다 번번이 좌절을 겪으며 지금껏 단 한 번도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들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2020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 조직위원회'는 지난달 26일, 지금까지 진행된 운동의 성과를 총망라한 '한강하구 평화의 배 백서'를 발간했다.

270쪽 분량의 책자는 평화의 배 띄우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2005년 이후의 활동상을 연도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특히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가 대거 참여해 펼쳐진 지난해 활동 내용을 현장 사진과 참고자료, 언론보도, 인터뷰 등과 함께 상세하게 소개했다.

 

'풍요의 바다'로 알려진 한강하구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 한탄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한강하구는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인파가 넘치는 '풍요의 물길'로 알려져 왔다.

고려시대 때 수도 개성의 관문이었던 이 곳에는 당시 최대 국제무역항인 벽란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의 교역도 빈번해 이들을 통해 고려의 이름이 '꼬레아'로 퍼져 나갔다.

조선 때도 한양으로 진입하는 통로 역할을 맡아 구한말까지 숱한 영욕을 겪어냈다.

 

정전협정, 한강하구에서 민간선박 자유로운 항행보장

한강하구가 '침묵의 물길'로 추락한 것은 6.25 한국전쟁 이후다. 전쟁 막바지에 남북이 양쪽을 각각 차지한 채 휴전을 맞았다.

유엔군 총사령관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중국인민지원사령관이 1953년 7월 27일 체결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은 이 곳을 '개방된 지역'으로 명기했다.

이 협정 제1조 5항은 “한강 하구의 수역으로서 그 한쪽과 다른 한쪽의 강안이 각각 일방의 통제 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용선박'의 항행에 이를 개방한다”고 규정했다.

남북이 차지하고 있는 강기슭 100m 밖의 수면에서는 민간 선박의 항행이 자유롭게 허용된다는 의미다.

협정체결 당사자들은 뒤이어 같은 해 10월 3일 정전협정 후속합의서인 '한강하구에서의 민용 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을 채택했다.

이 합의서 제7조를 통해 한강하구에서 유일하게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항을 명시했다.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모든 군용선박과 군사인원 및 무기, 탄약을 실은 민용선박과 중립국 선박은 모두 한강 하구 수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군용선박 등을 제외한 여타 민용 선박은 등록만으로 자유롭게 항행하도록 재차 보장한 것이다.

제9조를 통해서는 “적대 쌍방사령관은 자기 측의 선박 등록에 적용할 규칙을 규정한다”고 명시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등록이란 일정한 요건만을 갖추면 등록증을 발급해 자유로운 차량운행을 보장하는 요즘의 '자동차 등록 제도' 수준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상위규정인 정전협정이 이미 '민용 선박 항행의 개방'을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휴전 이후에도 남북간 긴장상태가 계속되면서 한강하구의 선박 자유항행 보장 조항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한강하구가 마치 육지의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DMZ)와 같이 유엔사에 의해 민간인 출입이 차단되는 곳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6.15 선언 이후 한강하구 배 띄우기 첫 시도

이처럼 사실관계가 뒤바꾼 것을 알아낸 이가 리영희 한양대 교수다. 리 교수는 1999년 7월 발간한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라는 저서에서 '자유항행 보장 조항'을 찾아냈다.

1년 뒤인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평화운동가들은 여기에 힘입어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그해 6월 25일 최초의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를 시도했다.

이런 노력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책과 제2연평해전 등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평화운동가들이 다시 힘을 모아 이번에는 300명이 탈 수 있는 배를 빌려 본격적인 행사를 진행했다.

이후 2008년까지 활발하게 진행되던 이 행사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쇠퇴하고 말았다. 평화의 배를 띄우지 못하게 되자 때로는 종이배를, 때로는 나뭇잎 배를 띄우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동안 한강하구는 민간 선박의 항행을 차단하는 유엔사의 관할권이 당연한 듯 인정되고, 국방부는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기형적 상황이 계속됐다.

 

문재인 정부 이후 10년 만에 평화의 배 띄우기 재개

꺼져가던 '평화의 배 띄우기'의 불씨는 문재인 정부의 등장으로 10년 만에 다시 살아났다.

2018년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해상 등의 적대행위 중단과 서해 평화수역 조성, 어로활동 보장 등이 합의되면서 평화의 배 띄우기도 활기를 되찾았다.

비록 한강하구 중립수역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정전 기념일인 그해 7월 27일 강화군 외포리에서 교동대교 인근까지 항해를 했다.

9월 19일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9.19 군사합의에서 '한강하구 공동이용을 위한 군사적 보장대책을 강구할 것'을 명문화했다.

하지만 2019년 2월 개최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한반도 화해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남·북·미 관계가 악화될수록 평화의 배 띄우기는 열기를 더해갔다. 이 행사를 '평화를 되살리는 촉매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감이 번져 나갔다.

2019년 7월 27일 열린 행사는 500여 명의 참가자들이 모인 가운데 '벽란도 뱃길을 열다'를 주제로 펼쳐졌다.

2020년 7월27일 인천시청에서 열린 '2020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 평화순례단 발대식'에 참석한 도성훈 인천시교육감이 환송사를 하고 있다. /인천일보DB

'한강하구 중립수역을 평화의 바다로'

2020년 들어서는 4월 28일 첫 회의를 시작으로 연일 강행군을 이어나갔다.

6월 17일 '2020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 조직위원회(이하 조직위)'가 출범한데 이어 7월 9일에는 국회에서 '한강하구 중립수역을 평화의 바다로'를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조직위는 7월 27일 인천시청에서 '한강하구 중립수역 선포식과 평화순례단 발대식'을 개최한 뒤, 곧바로 한강하구에 띄우지 못한 배를 차에 싣고 광화문으로 내달았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선포식과 퍼포먼스를 진행한 일행은 강화도로 자리를 옮겨 '평화와 통일 기원 문화제'를 함께 했다.

 

한강하구 평화의 염원, 전세계로 전파해야

지난 2월 5일 조직위는 2021년 사업을 이끌어갈 새집행위원장에 박흥열 강화언론문화협동조합 이사장을 선임했다.

박 이사장은 ▲평화수역 국·내외 홍보 확대▲한강하구 지역 시민단체 조직위 동참 ▲한강 접근을 가로막는 철조망 제거 등을 올해 역점 추진사업으로 제시했다.

그는 “한강하구가 평화중립수역이라는 사실이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관련 자료를 번역해 외국의 평화단체와 활동가들에게 배포하는 작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김포, 파주, 고양, 서울 등 한강하구 수역 시민단체들을 조직위에 폭넓게 참여시키는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월 26일 평화백서 발간 기념식에 참석한 조택상 인천시 균형발전정무부시장과 안병배 시의원 등은 '평화의 배 조직위 상설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조례 제정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박 이사장은 “한강하구 중립수역은 평화와 자유의 염원이 응집된 곳”이라며 “정부와 자치단체, 시민들의 뜻을 모아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에 평화의 울림을 전파하는 상징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찬흥 논설위원 report61@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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