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합류에 이은찬 의병장 보조원 귀순 격문
헌병 처단 후 수급 가져 오면 상여금 지급 천명
우편물 탈취 통한 군자금 확보 정보 건네기도
창의원수부 돌압산 전투 대승에 일제 대대적 반격
지도부 와해…의병들 소규모 부대로 흩어져 피신
의진 수습 후 경기 북동부서 수차례 유격전 지휘
일제 포위망 좁혀오자 군자금 모아 북간도행 결심
서울 잠입했다 피체됐으나 탈출…강원도서 활동
1911년 원산서 다시 피체…용산으로 압송돼 순국
◆ 창의원수부 중군장이 되어
강기동을 비롯한 헌병보조원 출신이 의병대열에 참여하자 이은찬 의병장은 각지에 격문과 함께 헌병보조원 집으로 비밀통문을 보내어 헌병보조원이 일본군경의 앞잡이가 되지 말고, 헌병을 처단한 후 그 머리를 가지고 의진으로 오면 특별상여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폭도수령(暴徒首領:의병장-필자 주) 이은찬(원수부 중군장이라 칭함)
위 사람은 이달 2일 양주군 어등산면 회암면(檜岩里)에 이르러 그 부근의 각 헌병분견소 보조원 등에게 아래 의미와 같은 비밀통문을 발했다고 한다.
'그대들이 대한 인민으로서 단지 생활을 위해 외국인의 노예가 되었지만 진심으로 일본에 진력하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들이 출장할 때 일본 헌병 1명이 그대들 3~4명을 이끌고 출장하므로 기회를 엿보다 그대들 3~4명이 헌병 1명을 죽이고 그 머리를 우리 의병대에 들고 오면 일국의 충신으로 하고, 또 특별상여금으로 현금 50원을 주겠다. 그대들은 숙고한 후에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라.'” (<통감부문서> 6권. 1909년 3월 8일)
이은찬은 우편물을 단순히 편지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재무서(財務署)에 납부하는 공금은 우편국에서 우편물과 일괄하여 경성에 송부하는 것이므로 이를 빼앗아 군자금으로 이용하겠다고 한 것이 드러나고 있다.
“목하 경기도 영평군(1914년 포천군에 통합됨-필자 주) 방면을 배회한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이은찬은 우편물 약탈에 관하여 좌와 같이 양언하고 있다고 한다.
'우편물은 단순히 서신뿐으로 사려하고 금일까지 약탈을 포기하고 있었으나 이번 아당(我黨:창의원수부-필자 주)에 간여한 전 헌병보조원의 말에 거하면 재무서에 납부하는 공금은 우편국에서 취급하여 타의 우편물과 일괄하여 경성에 송부하는 것이라 한다. 고로 우리는 금후 지포(芝浦:강원도) 의정부 간에서 공금이 있는 우편물을 약탈하려고 한다.' 운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77~278쪽)
이은찬이 구상한 우편물 탈취를 통한 군자금 확보 계획은 강기동이 헌병보조원 시절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계획된 것으로 세금 탈취를 통해 일제와 매국내각에 반대함과 아울러 의진의 군자금 마련을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강기동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헌병대 내부의 사정은 물론, 군자금 마련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창의원수부의 의병투쟁에 많은 공헌을 하게 되어 의병에 투신한 지 얼마 후 창의원수부 중군장으로 활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돌압산전투에서 승전하였으나
창의원수부 의진은 1909년 1월부터 2월까지 약 20차례에 이르는 의병투쟁을 전개했는데, 특히 2월25일 양주군 석적면 항동(項洞) 부근의 돌압산(乭壓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전력을 거의 소진한 창의원수부 의진은 이틀 후 양주군 광적면 덕도리(德道里)에서 다시 일본 헌병대·순사대·변장대와 탄약을 다 소비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보(前報)와 같이 양주 도착 후 각 방면 정찰 중 지난 25일 수야(水野) 감독순사 이하 5명(일순사 1명, 한순사 4명)이 양주군 어등산면 방면을 정찰 출장 중 일찍이 발하여 둔 밀정보고 및 수사하여 득한 정보를 종합하면 당지 방면 적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이은찬·정용대 양명은 부하 170여명을 인솔하고 지난 25일 양주군 석적면(윤인순의 출생지) 항동(項洞)에 잠입한 것을 탐지하였다. …
오후 4시 각 일행을 2대로 나눠 미즈노 부대(일순사 무장 3명, 한순사 1명, 변장순사 일·한인 4명)와 전(畑) 부대(무장일순사 3명, 동 한순사 2명, 일·한변장 3명)는 별지 도면의 위치에 이르자 적은 전방 1000미터의 돌압산(乭壓山) 상에 본대 무릇 100명을 배치하고 산록의 우측 고지 송림 중에 정병 약 30~40명이 복재하고 있음에 봉착하고 서로 총화를 개하였다.
적의 본대인 산상으로부터 수야 부대를 격하는 탄환은 거리 불과 1000미터의 원거리에 유효히 착탄할 뿐만 아니라 시시로 위협적 대포 모양의 것을 발사하여 그 음향이 산악을 명동하여 그 세 용이히 얕볼 수 없는 것이었다.
좌측 전 부대 역시 비상한 고전을 하여 적의 착탄이 확실하여 위치를 버티기 불능하기에 이르러 후방 산상에 퇴각하였으나 수야 부대와의 연락을 잃어 수야 부대는 적의 우측 송림 중에 복재하고 있던 30~40명의 적(賊)이 전 부대의 제1위치로 옮기어 측면으로부터 불의의 일제사격을 수하여 적탄우비 간에 개재하여 용전하였으나 중과불적으로 변장대의 권총이 주효치 못하고 한 부대 전부가 멸할지도 모를 사지에 함하여 이제 탄환이 거의 진하여 대항할 수 없기에 이르러 겨우 몸을 빼어 후방 전 부대에 합하여 오후 9시 일동이 양주읍내에 퇴각하는 것이 부득이하기에 이르렀다.“
창의원수부 의진의 공격에 후퇴한 후 일제는 3월부터 양주경찰서와 헌병분견소를 중심으로 창의원수부 의진 진압을 위해 대대적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3월16일 창의원수부 우군장 윤인순(尹仁淳)이 일본군과 전투 중 사망한 데 이어 3월31일에는 이은찬마저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으니, 창의원수부 의진은 사실상 무너진 것이었고, 경기북부 의병들에게는 구심점을 잃은 것이었다. 따라서 대다수 의병들은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산악으로 몸을 숨기는 상황이 되었다.
◆ 경술국치 이후까지 독자 의진 이끌다
4월 초 강기동은 남학서(南鶴瑞)·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 등과 의진을 수습하고 이은찬이 사용했던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 중군장' 대신 '창의원수부(倡義元帥部) 중군장', '창의원수부대장소(倡義元帥部大將所)'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경기 동북지방에서 가장 활발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09년 음력 4월 1·2일자로 양주군 건천면장과 금촌면장에게 온 격문에서 “창의원수부(倡義元帥部) 중군소”와 “창의원수부 중군장 강(姜)”은 모두 강기동으로 보았다.
그는 경술국치 이후까지 20~40명 규모의 의진을 이끌고 유격전을 전개했는데, 일제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 지역을 살펴보면, 1909년 6월 경기도 포천군 내소면·가산면, 광주군 퇴촌면, 7·8월에는 양주군 둔야면·노원면, 양평군 남종면, 9월에는 영평군(현 포천군) 일동면·양주군 하도면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고, 10월 이후에는 연기우(延起羽)가 이끄는 창의존양군수부(倡義尊攘軍帥府) 의진과 연합하여 포천 지역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원산에서 피체되어 용산에서 총살, 순국하다
1910년에도 연기우 의진과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벌이자 일제는 현상금 500원을 걸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해 2월10일부터 2개월에 걸쳐 순사와 밀정들을 변장시켜 그가 활동하던 광주, 포천, 양주 등지를 샅샅이 뒤지며 그를 붙잡기 위해 혼신을 기울였으나 그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헌병대의 활동으로 한인수(韓仁秀), 김순복(金順福) 등 의진의 의병들이 피체되는 등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자 더 이상 소규모 유격전으로는 일본 군경을 궤멸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군자금을 모아 북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액수가 부족한 까닭에 필요한 액수를 모을 때까지 국내에 잔류하면서 다시 활동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일제의 의병 탄압이 강화되자 의진을 해산한 다음, 5월27일 서울로 잠입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 경찰을 넘어뜨리고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다시 의병투쟁에 나섰다. 그해 6월 강두필(姜斗弼) 의진과 연합, 100여명의 의진으로 강원도 금성군 창동(蒼洞)에서 두 부대로 나눠 회양과 통구 방면으로 진출하는 등 점차 북상하였다. 일제는 그를 붙잡기 위해 임시파견소를 설치하고 작전을 전개하였다.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40여 일에 걸쳐 경기도·황해도 지역에서 의병초토화작전을 전개함에 따라 더 이상의 의병활동 근거지가 없어지게 되자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에 강기동은 북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이동하던 중, 1911년 2월16일 함경남도 원산의 한 음식점에서 피체되었다. 그는 원산항에 있던 오사카(大阪) 상선 편으로 인천을 거쳐 서울 용산 일본군사령부로 압송되기에 이르렀고, 4월17일 8시 일본군 사령부 군법회의에서 '포형(砲刑)'이 선고되어 용산의 행형장(行刑場)에서 총살, 순국 되기에 이르렀다.
1911년 4월19일자 '매일신보'에는 '강기동 포형'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순국 기사를 실었다.
“경기, 강원, 함흥의 각 지방으로 출몰하여 양민을 살해하고, 전재를 약취하다가 악운이 이진하였든지 원산 내지인 거주지점 내 오처루(吾妻樓)(요리실)에 등하여 주식을 탐하다가 해지 관헌에게 포박되어 월전에 경성으로 압상하여 심사를 필하고, 용산 군사령부 군법회의에 부(附)하였던 적괴 강기동은 재작(再昨) 조(朝) 용산에서 명석(明石) 경무총장, 주만(鑄万) 포병연대장, 산형(山形) 중좌 제1헌병 및 용산헌병대장, 송촌(松村) 부관 및 군사령부, 제2사단 각 부관, 이궁(二宮) 법관부장 등이 입회하여 오전 8시에 사형집행을 선고하고, 보병 65연대 병사 3명으로 하여금 포형(砲刑)을 거행케 하였는데, 불과 1발에 좌액부(左額部:왼쪽 이마-필자 주)를 관통하여 춘초(春草)의 일점로(一點露)를 화성(化成)하였더라.”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2011. 02)로 선정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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