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앞잡이 삶 버리고 항일투쟁 고난의 길 나서다
▲ 대한제국 기병대의 모습(1900~1907). 시위대(侍衛隊)는 황제와 황실을 호위하는 부대였고, 친위대(親衛隊)는 궁궐 수비대로 각각 기마대를 두었기에 시위기병대, 친위기병대라고 하였다. 시위대는 오늘날 청와대 경호부대, 친위대는 수도경비사령부와 유사한 성격이었다.
▲ 대한제국 기병대의 모습(1900~1907). 시위대(侍衛隊)는 황제와 황실을 호위하는 부대였고, 친위대(親衛隊)는 궁궐 수비대로 각각 기마대를 두었기에 시위기병대, 친위기병대라고 하였다. 시위대는 오늘날 청와대 경호부대, 친위대는 수도경비사령부와 유사한 성격이었다.
▲ 고안헌병분경소 (헌병)보조원 강기동이 의병 2명과 함께 총 2정, 탄환 300발, 권총 1정, 총검 5정을 휴대하고 탈출했다는 일본 헌병대 기밀문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09. 01. 07.)
▲ 고안헌병분경소 (헌병)보조원 강기동이 의병 2명과 함께 총 2정, 탄환 300발, 권총 1정, 총검 5정을 휴대하고 탈출했다는 일본 헌병대 기밀문서. (<폭도에 관한 편책> 1909. 01. 07.)

 

▲ 국립서울현충원 순국선열·애국지사 묘역 내 강기동 의병장의 묘.
▲ 국립서울현충원 순국선열·애국지사 묘역 내 강기동 의병장의 묘.

1907년 군대해산 이전 기병대 참교로 복무
일어 능통해 경기 양주 고안헌병분견소 근무
총기·탄약 탈취하고 붙잡힌 의병 2명과 탈출

경기 장단 고랑포 지역 분견소 공격 사실에
이 지역 헌병보조원 출신으로 와전되기도

보훈처 '공적조서'엔 본적지 경기 장단 기록
일제 기밀문서엔 '서울 명동' 출생으로 명기

 

 

◆ 장단 고랑포 헌병보조원 출신 의병장으로 알려져

▲ 강기동 의병장 초상화.
▲ 강기동 의병장 초상화.

 

강기동(姜基東, 1884~1911) 의병장은 의병활동으로 포상을 받은 2648명(2020년 3월1일 현재) 중, 연기우(延基羽), 유인석(柳麟錫), 이은찬(李殷瓚), 이인영(李麟榮), 전해산(全海山) 등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14명의 의병장 가운데 한 분이다.

국가보훈처가 처음으로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1987)에서는 그의 공적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기술한 흔적이 역력하다.

 

“강기동은 서울 명동에서 출생하였으며, 경기도 장단 고랑포(古浪浦)에서 헌병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1907년 정미7조약과 군대해산이 일제에 의하여 단행되자 뜻있는 많은 의사들이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고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의병들은 정규군인 관군과 일군에 의하여 속속 체포·사살 당하였다. 이때 강기동이 근무하던 장단에는 의병투쟁을 하다가 체포된 인물들이 다수 투옥되어 있었다. 그가 옥문을 열어주어 많은 의병들을 구출할 수 있었으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의거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의병대장이 되어 각지의 의병장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권. 437~438쪽)

 

국가보훈처는 강기동의 공적에 대하여 <매천야록>(황현),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등 7권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했다고 하였으나 포상이 이뤄졌던 1962년과 공훈록이 처음 간행되었던 1987년에는 국내외 문헌, 특히 일본의 기밀문서인 <폭도에 관한 편책>(122권)이 <한국독립운동사>(의병편 12권)로 완간되기 전이어서 학계에서조차 한말 의병투쟁에 대하여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에 국가보훈처 입장에서도 한계가 있었다. 1992년 <한국독립운동사>가 완간되고, <통감부문서>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의병 판결문이 드러나게 된 오늘날에는 지난날 포상했던 상당수의 의병(의병장)의 공적 내용 중에 오류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 국가보훈처 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첫머리에 “경기도 장단(長湍) 고랑포(古浪浦)에서 헌병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로 수정해 놓았다. 이는 계봉우(桂鳳禹)의 <의병전>,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1920. 05. 11.)의 내용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들 자료는 근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내용 중 피체와 순국 과정 등 주요 내용이 사실과 매우 다르고, 전기적(傳奇的) 요소가 많아 사료로 삼기는 부적절한 면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일제의 문서를 바탕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불가피하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의병사 연구의 슬픈 현실이다. 일제의 의병 학살 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 따르면, 그는 당시 경기도 양주군 고안(高安) 지역의 헌병대(분대·분견소·파견소 단위)인 고안분견소의 총기와 탄환을 탈취하여 피체되어 있던 의병과 함께 탈출한 것이 여주경찰서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기밀문서 '여경비수 제26호의 1'(1909. 01. 17.)에 드러나고 있다.

 

“본일 양근순사주재소 근무하는 순사 사토우야스노리(佐藤靖憲)의 보고에 의하면 양주군 고안헌병분견소(高安憲兵分遣所) 보조원 강기동(28)은 동소 유치중인 폭도(暴徒:의병-필자 주) 2명과 통하고 본월 15일 아침 제복을 착한 채로 총 2정, 탄환 300발, 권총 1정, 총검 5정을 휴대하고, 3명 공히 도주하였다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0쪽)

 

일본 군경의 문서와 <통감부문서>에는 그가 고안분견소 헌병보조원이었다는 것이 일관되게 나타나 있고, 의병활동 중에 장단 고랑포 지역에서 헌병분견소를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그가 고랑포 헌병보조원 출신이었다고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 서울 태생의 기병대 참교 출신

국가보훈처 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공적조서'에는 강기동 의병장의 본적지가 경기도 장단이라 하고,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종전의 기록인 “강기동은 서울 명동에서 출생하였으며”라는 부분을 삭제하였으나 종전 공훈록 내용처럼 일제의 기밀문서에는 그의 일가(一家)는 “일찍이” 서울에서 거주하였고, 군대해산 전에는 시위대의 기병대에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황해 양도를 횡행하며 폭학(暴虐)을 영(逞)하여 우리 관헌에게 불선(不 )한 피해를 준 폭도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강기동의 가족은 당서(當署) 부내(部內) 부평군(富平郡)에 이주하였다는 것을 첩지(諜知)하고 근래 그 소재를 수사하였던바 겨우 부평군 수탄면(水呑面) 오류동(梧柳洞:현 서울 구로구 속동)에 잠재(潛在)하였음을 발견하고 나아가 이전(移轉) 후 그들의 행동을 수사하였던바 좌와 같다.

강기동의 일가(一家)는 일찍이 경성에 거주하고 본인의 형제는 다소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나 누이는 인천군내 아무개 동에 출가하였는데, 일가 불화합하여 오류동에 이전하고부터 강기동의 가족도 경성을 정리하고 강기동의 실부(實父) 및 실자(實子, 3, 4세)는 작년 말 이전하여 와서 실부는 동민에게 유아의 부는 이전 기병대(騎兵隊)에 재근(在勤)하고 일어에 통하여 목하(目下) 헌병보조원이 되어 아무개 곳에 재근하고 있다고 말하여 동민들을 기만하고 평소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도식(徒食)하고 있으며, 작년 말 야간 단발한 장한(壯漢) 1명이 몰래 동가를 방문하였는데, 그 내왕을 샛길로 하여 사람의 눈을 피하는 거동이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권. 384~385쪽)

 

이 기밀문서는 1910년 3월30일 인천경찰서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것이다. 강기동 집안은 진주 강씨로 일찍이 서울에서 다소의 재산을 보유하고 살고 있었는데, 집안사람들과의 불화로 부모와 함께 가족들이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오류동으로 이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전 기병대(騎兵隊)에 재근(在勤)하고 일어에 통하여 목하(目下) 헌병보조원이 되어”라는 구절에 주목해 보면, 그는 군대해산 전에는 기병대에 근무했고, 일어에 능통했던 것을 의미한다.

대한제국 기병대는 종전의 체제를 바꿔 1900년에는 1개 대대 4개 중대로 이루어졌고, 1개 중대는 4개 소대로 편제되었으며, 참령인 대대장을 비롯하여 장교 80명과 병졸 328명으로 구성되었으나 러일전쟁 후 일제에 의해 1개 중대로 대폭 축소되었다가 1907년 8월 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병대 오장(伍長) 신분이었다는 기록이 '매일신보'에 수차례 나타난다.

 

“의병장 강기동이 1911년 2월12일 원산에서 체포되었는데, 구한국 기병(騎兵) 오장(伍長)으로 있었고 군대해산 후는 일본 헌병대에 헌병보조원이 된 일이 있었으나 부하를 거느리고 의병으로 활동하여 경기, 강원, 황해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권. 1911년 2월12일조. '매일신보' 1911년 2월16·18·19·21·25·26일 기사 참조)

 

'오장(伍長)'은 일본군 하사(下士)를 칭했던 것이지만, 대한제국 군대에서는 참교(參校)라고 했으니, 군대해산 전에 기병대 분대장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보병 하사관(현 부사관) 출신 의병장은 전술한 바가 있는 연기우(延基羽), 유명규(劉明奎), 지홍윤(池弘允) 등 상당수가 있는 데 비해 기병대 출신 의병장은 드물다. 그것은 보병에 비해 기병의 인원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으로 본다.

기병대 출신 의병장의 예를 들면, 김용기(金龍基)(건국훈장 애국장·4등급) 의진과 조인환(曺仁煥)(건국훈장 독립장·3등급) 의진에서 활약했던 신창현(申昌鉉)(건국훈장 독립장·3등급) 의병장도 시위대 기병 출신이었고, 1907년 8월 광무황제의 밀지(密旨)를 받고 거의한 박정빈(朴正彬) 의진에서 창의돌격대 총대장이 되었고, 김봉기(金鳳基)라는 이름으로 1908년 4월부터 10월까지 강화도를 비롯하여 교동도와 인근 도서지방, 경기도 개성·풍덕은 물론, 황해도 배천·연안 등지에서 활약한 김용기 의병장이 시위대 기병 부교(副校) 출신이었다는 것을 '일본 군함·수뢰정과 맞선 강화 의병장 김용기' 편에 전술한 바 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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