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19.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강기동(중)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19.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강기동(중)
  • 인천일보
  • 승인 2020.05.24 19:20
  • 수정 2020.05.28 17:10
  • 2020.05.25 경기판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병 겨냥했던 총구, 일제를 향해 돌리다

 

 

▲ 일진회 이용구(앞줄 왼쪽 다섯 번째. 왼쪽의 여자들은 이용구의 처첩)와 일본 극우단체인 흑룡회 다케다 한지(武田範之. 이용구의 오른쪽) 등의 모습(1908년 12월경. 이용구의 집). 일진회는 군대해산 이후 '자위단'을 조직해 의병 탄압에 앞장섰다.

 

▲ 강기동이 길인식 등 2명과 함께 고안헌병분견소를 탈출, 이은찬 의진에 참여했다는 일제 기밀문서(<폭도에 관한 편책>. 1909. 02. 18.)

 

▲ 일본군 헌병대 모습. 일제는 경술국치 전에는 경찰대와 헌병대를 운용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의병 진압에 나섰고, 경술국치 후에는 헌병을 경찰로 하는 헌병경찰제를 시행하였다.

 

일본, 메이지유신 이후 부국강병 골몰…조선 침략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 2월 한성에 통감부 설치

주차일본군 헌병사령관이 경무총장직 겸임

 

군대해산으로 의병 활동 거세지자 경찰력 부족

지역 지리 정황 익숙한 한인 헌병보조원 모집

1909년 4만3000여명 배치 진압·정보 수집

의병의 겁박·설득에 도주·동참하기도

 

양주·포천서 적군과 20여 차례 교전 이은찬 의진

인원·물자 부족 상태서 의병장 부상까지 겹쳐

휴식기 갖던 상황에 합류…사기 끌어올려

 

 

 

◆ 헌병보조원의 연원과 인원수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왕정복고를 통하여 중앙권력을 확립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유럽과 미국의 근대국가를 모델로 삼아 국왕(천황)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를 꾀한 것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긴 산물이 일제의 조선(대한제국)침략이었다.

일제는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 후 이듬해 2월 대한제국을 병탄할 목적으로 한성(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의 주차일본군 헌병사령관이 경무총장을 겸임하고, 경찰권을 빼앗아 의병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 이후 의병이 일어나고, 군대해산 후에는 해산군인이 의병에 참여함으로써 일본 군경의 힘만으로 이를 제압하기 어렵게 되자 대한의 군경을 순사로 채용하고, 나아가 일본군 헌병대에서 앞잡이 노릇을 할 인적 자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사람에게 '헌병보조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업무협의차 본국으로 갔던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1908년 6월11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전보로 알려줌으로써 처음 사용하게 되었다. 이미 통감부와 이완용 매국내각은 이를 구체적으로 협의를 끝낸 상태에서 일본 국왕(황제)의 재가를 받은 것을 이완용 매국내각은 이날 융희황제의 재가를 받아 칙령(勅令)으로 반포하였다.

 

“짐이 폭도의 진압과 안녕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한국 주차 일본 헌병대에 의탁할 건을 재가하여 이에 반포하게 한다.

* 폭도 진압과 안녕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한국주차일본헌병대에 의탁하고 해당 대장(隊長)의 지휘를 따라 복무하게 한다.

* 헌병보조원은 군속(軍屬)으로 한다.

* 군부대신은 한국주차일본헌병대장의 요구하는 사항에 대하여 헌병보조원에 관한 사무를 처리한다.

* 헌병보조원의 결원ㆍ보충은 한국주차일본헌병대장이 이를 행한다. 단 군부대신은 필요에 응하여 지방관에게 명령하고 이를 원조하게 한다.

* 헌병보조원에 관한 제반 규칙은 한국주차일본헌병대장의 정한 바에 의한다.

* 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한다.

* 헌병보조원은 오른쪽 어깨 부위에 붉은색의 이화휘장(李花徽章)을 부착한다.“

 

이완용 매국내각 총리대신은 융희황제에게 칙령을 내리게 한 후 이것을 바로 이토에게 보냈는데, 그 전문이 <통감부문서> 5권 '한국인의 헌병보조원 명칭 사용 및 귀임 일시 통보 건'(1908. 06. 11.)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앞서 조칙을 받들고 각 군대해산에 즈음해 인민이 동요하지 않도록 예방하거나 혹은 이칙폭동자(異勅暴動者)는 진압할 것을 각하에게 의뢰 드리기에 이르렀던 바, 그 후 귀국 정부는 종래 주차하는 수비대 외에 다시 군대 및 헌병을 증파하여 폭도 진압에 종사시켰습니다. 각 지방이 아직 정정(征定)에 이르지 않았는데, 이는 병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전혀 그 활동이 불편한 데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에 지방의 지리 정황을 숙지한 자를 선발하여 이들을 일본 헌병의 보조원이 되게 하여 한편으로는 진압에 편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인민의 안녕질서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각하의 동의를 거친 별지 칙령(勅令:별 전보 제3)을 공포하는 건을 상주하여 재가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그 실행 등에 관해서는 오로지 각하의 재량에 의뢰하라는 칙령을 봉승하였으므로 이에 조회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동의하신 다음 적의 조처하여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이완용에 의하면, 일제가 군대와 헌병을 증파하여 의병 진압에 나섰지만 그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병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일본 군경의 활동이 불편한 데 기인한다고 여겨 지방의 지리 정황을 숙지한 자를 선발하여 이들을 일본 헌병의 보조원이 되게 함으로써 의병 진압에 편의를 도모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1913년 '조선주차일본군사령부'가 간행한 <조선폭도토벌지>에는 의병 진압을 위해 1908년 일본군, 헌병보조원, 경찰 등을 포함하여 1만1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1909년에는 일본군 2개 여단의 병력을 더 투입하고 4~5월 사이에 천안 및 영산포 헌병 분대의 관할 하에 45개소의 임시파견소를 증설하는 한편, 4만3000여명의 한인 무뢰배를 헌병보조원이라 하여 분산 배치하고 의병 진압과 정보수집에 주력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 헌병보조원 중 의병 참여자

강기동이 양주군 고안헌병분견소 헌병보조원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1월15일 그곳에 갇혔던 의병 2명과 함께 헌병보조원 옷을 입은 채로 총 2정, 환탄 300발, 권총 1정, 총검 5정을 휴대하고 탈출한 것은 전편에 상술한 바 있다.

이어 헌병보조원 5명이 헌병분견소를 탈출한 사건이 양주경찰서장이 경기도경찰부장에게 보고하고, 경기도경찰부장이 내부경무국장에게 보고한 기밀문서인 '헌병보조원 도주의 건에 관하여 양주경찰서장 보고요령'(1909. 01. 17.)에 나온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양주 축산리 헌병분견소 헌병보조원 5명이 탈출한 것은 강기동보다 3일 먼저였다.

 

“본월 12일 양주군 축산리 헌병분견소 헌병보조원 5명이 도주하였다. 그 원인은 불명이나 추찰컨대 일찍이 폭도(暴徒:의병-필자 주)로부터 '헌병보조원이 되어 우리 의병을 초토하려 함은 부당하다. 의연히 이에 종사한다면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다' 운운한 협박을 받고 그 후 본월 7일 폭도의 내습이 있었으므로 에 드디어 위구(危懼)의 생각이 일어나서 마침내 도주한 것 같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0쪽)

 

헌병보조원이 된 자는 대부분 미천한 신분이거나 시정잡배였는데, 일제에 협력함으로써 돈과 다소의 위력을 얻고자 하는 자였다. 헌병보조원은 1908년 6월 중순 이후 모집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는 그 인원수가 4만 명이 넘었다. 그들에게는 8원의 월급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일반 노동자 4배 정도의 임금이었고, 당시 쌀값으로 치면 약 3석치가 되는 꽤 큰돈이었다.

헌병보조원은 헌병대에 배속되어 그들 앞잡이가 되어 의병 진압에 나섰는데, 해당 지역의 지리나 인적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활용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의병활동이 점차 어려워지게 되자 의병은 헌병보조원을 회유하거나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하여 겁박하였고, 그로 인해 일부 헌병보조원은 의병 대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 이은찬 의진에 참여하다

강기동이 길인식(吉仁植) 등 의병 2명과 더불어 총과 탄약을 휴대하고 양주 고안헌병분견소를 탈출하여 달려간 곳은 이은찬(李殷瓚)이 이끌었던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 의진이었다.

 

“양주군 고안 헌병보조원 강기동은 본월 상순 동소에 유치 중이던 폭도 길인식(吉仁植)이란 자와 관(款)을 통하고 소원(所員)의 간극(間隙)을 엿보아 동인과 공히 도주하여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이은찬의 부하에 투하였다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80쪽)

 

이은찬 의병장은 을사늑약 이후 강원·경기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부친의 병환이 깊어지자 고향으로 돌아갔던 이인영(李麟榮) 의병장을 이구채(李球采)와 더불어 설득하여 마침내 관동창의대장에 오르게 한 후 13도창의대진을 형성하여 서울진공을 수행했던 의병장이었다. 서울진공이 실패한 후 경기도 북부지역에서 '창의원수부' 중군장(대장)에 올라 좌군장 정용대(鄭用大), 우군장 윤인순(尹仁淳)으로 하는 대규모 연합의진을 이끌고 있었다.

창의원수부는 1908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 중순까지 양주·포천 지방의 산악을 배경으로 20여 회에 걸쳐 의병투쟁을 전개하여 일본 군경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으나 연일 계속된 전투로 인해 의병들이 사망하거나 부상하고, 탄약과 군량미마저 부족한 데다가 특히 의병장 이은찬의 부상으로 인하여 의병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이은찬은 의병들의 사기 진작과 군자금 확보, 무기와 군량미 확보, 병력 보충 등을 목적으로 휴식기를 취하며 부대를 재정비하려던 때에 강기동 등 헌병보조원 출신들이 의진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옴에 따라 의병들의 사기가 다시 진작되는 매우 반가운 일이 되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인천일보, INCHEONILBO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